권오현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2026년 5월
📖 이전 글: 한국 디지털 민주주의의 계보 — 광장의 효능감에서 일상의 민주주의로
이 글은 「한국 디지털 민주주의의 계보: 광장의 효능감에서 일상의 민주주의로」의 연장이자, 같은 글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응답이다. 첫 글이 1990년대 PC통신부터 2026년 ‘모두의 광장’까지의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를 다뤘다면, 이 글은 그 다음 한 장(章)을 함께 써 보려는 시도다.
7. 합의가 불가능한 불신 사회
한국 디지털 민주주의가 공진(共進)하며 쌓아온 참여의 역사는, 지금 새로운 위기 앞에 서 있다. 이번에는 권위주의 세력이 아니라, 합의 그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근본적인 도전이다.
여론조사는 오랫동안 민심의 거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조사 기관, 의뢰 주체, 질문 설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현실이 반복되면서, 시민들은 이제 여론조사 결과를 사실로 받아들이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정부 역시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공론화위원회, 시민대화, 온라인 의견 수렴 등 다양한 참여 방식을 시도해 왔다. 다양한 공론화는 그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동시에 “비교적 소규모의 인원이 참여한 정부가 설계한 과정이 진정한 숙의인가”라는 불신도 함께 존재한다. 참여의 형식은 늘어났지만, 결과에 대한 수용성은 함께 늘어나지 않았다.
온라인 공론장도 다르지 않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가 한국의 공론장을 장악하면서, 알고리즘은 시민들을 비슷한 성향끼리 묶고 서로 다른 의견을 접할 기회를 줄여왔다. 분노와 혐오가 체류 시간을 늘리는 구조에서 숙의는 이뤄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들이 대화하고 타협하는 대신, 각자의 진영 안에서 확신을 더 굳혀가는 방향으로 공론장이 재편되고 있다. 여기에 생성형 AI가 더해지면서 딥페이크와 합성 정보가 공론장을 오염시키고, 무엇이 사실인지 합의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론조사도, 정부 공론화도, 인터넷 여론도 — 사회적 합의의 도구로서 신뢰를 잃어가는 이 상황에서, 우리의 다음 광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8. 기관이 운영하는 정책 플랫폼의 다음
일상의 민주주의로
기관이 운영하는 정책 플랫폼의 흐름은 분명하다. 투표가 특별한 날의 이벤트에서 일상적인 참여의 방식으로 확장되는 방향이다. 시민들이 현재 사회에서 진행 중인 논의들을 언제든 들여다보고,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 댓글이나 투표로 곧바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기관이 운영하는 플랫폼은 진화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의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선거철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 숨 쉬는 구조로 나아가도록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진화의 한 윤곽은 서울시의 시민참여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이 설계해 온 5단계 발전 계획에서 엿볼 수 있다.[1] 이 계획은 ① 시민제안과 부서답변(50명 공감), ② 공론장 개설(500명 공감), ③ 시장 직접 답변(5,000명 공론장 참여)이라는 기본 단계 위에, ④ 서울에서 거주·생활·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급되는 ‘전자 시민권’을 통해 누구나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고, ⑤ 서울시 본청만이 아니라 산하기관·자치구·시의회·교육청까지 아우르는 통합 민주주의 플랫폼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즉, 의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사는 자리에서 올라오고, 결정은 한 기관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다층의 기관들이 함께 책임지는 구조로 향한다.

나아가 의제의 성격과 무게에 따라 온라인 토론·투표와 오프라인 시민대화·공론조사·시민의회를 유연하게 조합하는 다층적 시민 협력 플랫폼으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의제는 빠른 온라인 의사표시로 충분하고, 어떤 의제는 깊은 오프라인 숙의가 필요하다. 이 두 층위를 하나의 일관된 흐름 안에서 종합하는 것이 다음 단계의 과제다.
이 방향을 구체적인 모델로 정리하려는 시도가 이미 진행 중이다. 2025년 8월 5일 국정기획위원회가 주최한 ‘모두의 토론회 — 국민 정책참여 제도화’에서 사회적협동조합 빠띠는 「국민주권과 집단지성을 실현하는 사회적 대화와 민주주의 플랫폼 기반의 다층적 시민 협력 플랫폼」 1.0 제안서를 발표했다.[2] 이 모델은 크게 다음과 같은 구조를 제안한다.
- 제안 → 숙의 → 정책화의 일관된 흐름. 기존 청원·제안 중심 플랫폼은 의견은 모았지만 그것이 숙의로 이어지지 못한 채 종결되거나, 숙의는 일회성 공론화 이벤트로 분절되어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다층적 플랫폼은 같은 의제가 일상 제안 → 시민 숙의 → 정책 결정으로 끊김 없이 이어지도록 설계한다.
- AI 보조 + 시민 숙의의 결합. 수많은 시민 제안을 분류·요약·정제하는 데 AI를 보조 도구로 활용하되, 합의 도출은 시민들의 실제 대화와 토론이 담당한다. AI는 의제를 다듬는 보조자이지, 합의를 대신하는 자동장치가 아니다(이 경계선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더 다룬다).
- 중앙–지역–시민을 잇는 공론 생태계. 전국 단위의 의제와 지역 단위의 의제를 한 구조 안에서 다루되, 지역에서 시작된 숙의가 전국 의제로 올라갈 수 있고, 전국 의제가 지역의 맥락에서 다시 풀리는 양방향 구조다.
- 시민의회 등 숙의 기구의 정책 연계.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 학습과 숙의를 거쳐 권고안을 만들고, 그 권고가 정책에 실질적으로 반영되는 통로를 제도화한다.
- 법제 정비를 통한 안정화. 국민발안제, 온라인 투표, 시민의회 등 핵심 숙의 기구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여 정권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인프라로 만든다.

빠띠는 이 모델을 지난 10여 년간 1,200건 이상의 시민 캠페인(누적 참여 180만 명), 1,000회 이상의 오프라인 공론장과 시민 대화, 1,500곳 이상의 파트너 기관·단체와의 협력 경험 위에서 정리해 왔다.[3] 그리고 2017년부터 운영을 지원해 온 서울시 ‘민주주의 서울’, 그 경험을 표준화한 오픈소스 시민협력플랫폼 빠띠 데모스X(Parti DemosX), 실시간 투표·의견 수렴 솔루션 빠띠 타운홀(Townhall) 등 실제 작동하는 도구들이 이 모델의 토대다. 빠띠 데모스X는 서울시 외에도 부산시 ‘아임인부산’, 서울시교육청 ‘서울교육 소통광장’ 등 다양한 기관에 이식되어 한국형 시민 협력 플랫폼의 한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참여가 곧 더 나은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참여의 문턱이 낮아질수록, 그것이 실질을 갖추려면 충분하고 투명한 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2020년 공적 마스크 앱 사례처럼, 정부가 데이터를 개방하고 시민이 그것을 활용할 수 있을 때 참여는 비로소 문제 해결의 힘을 갖는다. 정보 없는 참여는 형식이고, 형식적 참여가 반복될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만 깊어진다.
시민의회, 대의제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가
일상적 직접 참여의 확대와 함께,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의 제도화 흐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와 숙의 과정을 거쳐 결론을 도출하는 이 방식은, 대의제가 담지 못하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보완적 기제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도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계기로 이 모델의 가능성을 경험했다. 무작위 추출된 5만 명에 가까운 모집단에서 표본을 거쳐 선발된 시민참여단 471명이, 약 3개월 동안의 학습과 토론을 거쳐 정부에 권고안을 제출했고, 정부는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주목할 점은 합숙 토론회 과정에서 시민참여단 중 96명이 처음의 입장을 반대 쪽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 정보와 숙의가 실제로 의견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4]
관건은 실질적인 결정권이다. 시민의회의 결론이 정책에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형식적 절차로 전락한다. 시민의회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보완재가 되려면, 그 결론이 실제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어느 정부에서든 일관되게 작동하는 제도적 기반 위에 서야 한다.
AI·데이터 기반 민주적 절차 — 경계선을 지켜라
기관이 운영하는 정책 플랫폼의 세 번째 방향은 AI와 데이터를 활용한 민주적 절차의 고도화다. 수만 명의 시민 의견을 실시간으로 분류하고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 공청회 내용을 요약하고 쟁점을 정리하는 일 — 이러한 역할에서 AI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경계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AI가 의견을 요약하고 분류하는 것(도구)과 AI가 합의를 도출하는 것(자동화)은 전혀 다르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시민 개개인의 발언 이력과 행동 데이터를 학습하여 그를 닮은 AI 페르소나를 만들고, 이 페르소나들끼리 대화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시뮬레이션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하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흥미롭지만, 이것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민주주의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대화와 합의의 과정 그 자체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시민들이 직접 마주 앉아 설득하고 설득당하며,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도 하는 그 과정에서 공동체는 신뢰를 쌓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 AI 페르소나가 대신 참여하는 구조에서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내 AI가 합의에 참여했다고 해서, 내가 그 결과에 책임을 지거나 진심으로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 설령 AI 페르소나들이 도출한 결론이 통계적으로 정교할지라도, 실제 시민들의 대화와 동의가 없는 합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외양을 한 알고리즘의 판정일 뿐이다.
또한 AI 페르소나 시뮬레이션은 본질적으로 학습 데이터에 담긴 다수의 패턴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 소수의 목소리, 정형화되지 않은 입장, 아직 언어로 다듬어지지 않은 새로운 의견은 통계적 평균 속으로 사라지기 쉽다. 신고리 공론화에서 96명이 입장을 바꾸었던 것 같은 실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변화가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
AI는 실제 시민의 온오프라인 숙의가 더 잘 작동하도록 돕는 보조자여야 하며, 대화와 합의의 과정을 대신하는 자동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9. 시민 공간의 다음
우리의 공론장을 직접 만든다
기관이 운영하는 정책 플랫폼의 변화와 함께, 시민 공간에서도 중요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플랫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론장 구조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각 국가와 지역 단위에서 자신들의 공론장을 직접 구축하려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공론장은 단순한 소통 채널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인프라다. 인프라를 누가 만들고 운영하느냐는 그 인프라 위에서 어떤 민주주의가 작동하느냐를 규정한다.
2024년 12·3 비상계엄 이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디지털 서비스들은 이 가능성의 씨앗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시민들은 국가나 플랫폼 기업이 아니라 스스로 도구를 만들고 서로를 연결했다 — 시국 선언을 모으고 아카이빙하는 사이트, 시민 행동을 안내하는 페이지, 가짜뉴스 팩트체크 봇, 광장에서 함께할 사람을 매칭하는 도구 등.[5] 그 에너지가 일상의 공론장을 만드는 방향으로 이어질 때, 다음 광장의 인프라는 비로소 시민의 것이 된다.
다음 광장은 하나의 플랫폼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양한 주제의 이슈 커뮤니티, 시민이 직접 대화하고 행동하는 광장, 제안과 공론과 결정으로 정책을 함께 만드는 시민협력플랫폼(정책 플랫폼)이 서로 연결되는 시민 공간의 층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데이터와 기술의 공공재, 신뢰할 수 있는 협력적 의사결정 기술, 혐오와 차별로부터 안전한 공간, 투명한 정보공개와 팩트체크, 시빅해킹의 문화 — 이 기반들이 함께 갖춰질 때 공론장은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온·오프라인의 병행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다. 온라인은 의제를 모으고 참여의 규모를 만들며, 오프라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쌓는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없고,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화염병에서 촛불로, 촛불에서 응원봉으로 이어져온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언제나 이 두 층위가 함께 작동했을 때 가장 강했다. 다음 광장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분리하지 않고, 서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함께 키워가야 한다.
공익적 소유와 운영을 요구한다
그런데 공론장을 직접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운영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공론장이 공익적으로 작동하려면, 그것을 운영하는 구조 자체가 공익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매일 쓰는 플랫폼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소비자의 불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통제의 문제다.
플랫폼 협동조합, 사회연대경제 모델, 디지털 공공재 — 이 개념들은 시민들이 데이터를 제공하는 수동적 사용자가 아니라, 플랫폼의 운영과 방향을 결정하는 주권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가 지향해온 것도 이 방향이다 — 크루 조합원이 주도하고 시민이 후원하는, 어떤 정권이나 자본에도 포획되기 어려운 소유 구조 위에 디지털 시민 광장을 짓는 것. 기술을 누가 소유하고 운영하느냐가 그 기술이 어떤 민주주의를 만드느냐를 결정한다. 공론장의 소유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참여 기능을 갖추더라도 그 공론장은 결국 상업 논리에 종속된다.

10. 결론: 다음 광장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앞으로의 민주주의는 더 많은 직접 참여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기관은 플랫폼과 시민의회와 데이터를 통해 이를 제도화하고, 시민 공간은 자신들의 공론장을 직접 만들고 소유하려 할 것이다. 한국은 시빅테크의 경험과 시민적 효능감의 역사를 바탕으로, 이 전환을 가장 앞서 실험해 보는 응답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저절로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연결이 늘어난다고 신뢰가 늘어나지 않았다. 더 많이 연결될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고립되었고, 알고리즘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들을 이어주는 대신 같은 생각끼리만 묶었다.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그 힘은 시민에게 돌아오지 않고 소수 플랫폼 기업에 집중되었다.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밖으로 밀려났다. 더 많은 참여 역시, 제대로 된 조건 없이 확장된다면 같은 역설을 반복할 수 있다.
이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위기는 단순한 제도의 실패가 아니다. 갈등과 혐오가 일상이 되고, 불신과 각자도생이 강화될수록 시민들은 민주주의 자체에 지쳐간다. 함께 결정하는 일이 너무 소모적이고, 어차피 달라지는 것도 없다는 감각이 쌓이면, 시민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불신하기 시작한다. 그 자리를 파고드는 것이 “효율적이고 공정한 시스템”, “편향 없는 전문가”, 혹은 “데이터로 민심을 아는 AI”라는 유혹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외부의 강압으로만 오지 않는다. 지친 시민들이 스스로 판단을 시스템과 관료와 알고리즘에 위임하는 방식으로도, 조용히 찾아온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참여가 실질을 갖추려면 투명한 정보가 있어야 하고, 시민 간의 대화와 소통이 온오프라인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AI는 그 과정을 보조하되 결코 대신해서는 안 된다. 특히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시민의 숙의가 자동화된 절차로 대체되는 방향은 경계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빠르고 정교한 계산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시민이 직접 대화하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그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론장의 소유와 운영이 공익적 원칙 위에 서야 한다.
그런데 연결이 저절로 신뢰가 되지 않듯, 참여도 저절로 연대가 되지 않는다. 소외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찾아 담아내고,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들이 실제로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설계할 때만 공론장은 포용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상을 혐오하고 각자도생을 선택한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판단이 아니라 상냥함과 다정함으로 다가서야 한다. 함께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설득이 아니라 경험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다음 광장이 해야 할 일이다.
다음 광장은 기술이 자동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시민이 직접 설계하고,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 그 자체가 민주주의다.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넘어 종말을 맞이했다는 예상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화염병에서 촛불로, 촛불에서 응원봉으로 광장의 언어를 바꾸어온 한국 시민들이, 이제 광장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의 다음 장(章)을 쓰고 있다.
각주
- 서울시 ‘민주주의 서울’ 5단계 발전 계획. 1단계(시민제안–부서답변, 50명 공감), 2단계(공론장 개설, 500명 공감), 3단계(시장 직접 답변, 5,000명 공론장 참여)의 기본 단계 위에, 4단계로 서울시에서 거주·생활·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급하는 ‘전자 시민권’을 통한 일상적 참여 확대, 5단계로 서울시 본청을 넘어 산하기관·자치구·시의회·교육청까지 아우르는 통합 민주주의 플랫폼으로의 확장을 목표로 했다. ↩
- 빠띠 데모스X, 「국민주권과 집단지성을 실현하는 사회적 대화와 민주주의 플랫폼 기반의 다층적 시민 협력 플랫폼」 1.0 제안서, 2025.8.5 국정기획위원회 ‘모두의 토론회’ 발표. 원문은 빠띠 데모스X 사이트에서 열람 가능(https://demosx.org/posts/o7tnoVy). 이 제안서는 향후 데모스X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된다. ↩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내부 집계(2026년 6월 기준). 누적 캠페인 1,200건, 캠페인 참여 누적 180만 명, 월 평균 이용자 약 10만 명, 협력 파트너 1,500곳 이상, 10년간 1,000회 이상의 오프라인 공론장, 월 최대 20회 이상의 공론장 운영. 2021년 코로나19 대응 공로 대통령 표창 수상. parti.coop. ↩
-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2017년 7~10월) 백서 및 정부 발표 자료. 무작위 층화추출된 전국 20,006명 중 참여 의향이 있는 5,047명에서 계통추출로 500명을 시민참여단으로 선발했고, 최종 종합토론회에는 471명이 참여했다. 약 3개월의 학습·숙의 끝에 시민참여단의 권고를 정부가 그대로 수용했으며, 종합토론회 과정에서 96명이 처음 입장과 반대 방향으로 의견을 바꾼 사실이 보고되었다. ↩
-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직후부터 한국의 시빅 해커, 시민 개발자, 디자이너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디지털 서비스 사례들. 시국 선언 아카이브, 행동 안내 페이지, 팩트체크 도구, 시민 매칭 서비스 등이 광장 안팎에서 빠르게 등장했고, 그중 다수가 코드포코리아(Code for Korea) 커뮤니티와 빠띠 시빅테크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확산되었다. 이 흐름은 2020년 공적 마스크 앱 사례와 마찬가지로 위기 상황에서 시민이 디지털 인프라를 직접 만드는 한국 시빅테크의 특징을 보여준다. ↩
댓글을 달려면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