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6년 8월 19일 헤이그라운드 성수시작점에서 열린 2026 동아시아 시민사회 컨퍼런스 「AI시대,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역할은?」 3부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AI 대응 경험 공유」의 발제 내용입니다. 빠띠와 하인리히뵐재단, 코드포코리아가 함께 연 자리였고,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대표로 발표했습니다. 디지털 시민 광장 빠띠에도 함께 싣습니다.
세 문장 요약
AI 시대의 물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로 옮깁니다. 한국 시민사회가 만들고 있는 답을 민주주의(by)·공공재(of)·기본서비스(for) 세 겹으로 정리하고, 그것이 실학의 이용·후생·정덕과 어떻게 겹치는지 봅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 AI를 민주화하는 여정을 제안합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한국 시민사회를 가리킵니다.
물음이 옮겨 가고 있습니다
이 컨퍼런스의 제목이 이미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AI시대,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역할은?」
우리는 지난 몇 해 동안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물어 왔습니다. 어떤 업무에 쓸지, 어떤 위험을 어떻게 막을지, 어떤 규칙을 세울지. 도구를 앞에 두고 던지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의 제목은 한 걸음 옮겨 가, AI 시대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묻습니다. 사회를 앞에 두고 던지는 물음이고, 저는 이 이동이 이 자리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시민사회가 그 두 번째 물음에 어떤 답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리 한 문장으로 적어 두면 이렇습니다. 방향을 정하는 것은 소유와 결정입니다.
방향은 토대에서 정해집니다
AI는 지난 30년 인터넷 기술이 보여준 성질 위에 서 있습니다. 저는 그 성질을 네 개의 힘으로 봅니다.
개방은 취약을 만들 수도 신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연결은 혐오를 옮길 수도 협력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축적은 격차를 만들 수도 호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동화는 사람을 추방할 수도 해방할 수도 있습니다. 넷 모두 병폐와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어서, 어느 쪽으로 갈지에 대한 답을 기술 안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방향은 두 겹 아래에서 정해집니다. 표면에는 서비스와 규제와 윤리가 있고, 우리는 늘 여기서 다툽니다. 그 다툼은 분명 중요합니다. 다만 우리가 표면에서 다투는 동안 방향은 이미 아래에서 정해지고 있습니다. 토대에는 두 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누가 소유하는가, 그리고 누가 결정하는가. 이 글 전체의 축이 여기 있습니다.
답의 단위는 공동체입니다
지금 공동체는 양쪽에서 눌리고 있습니다. 안에서는 양극화와 각자도생이 밀고 들어옵니다. 공론장은 갈라지고, 돌봄과 위험은 개인에게 내려앉고, 함께 결정해 본 경험은 옅어집니다. 밖에서는 플랫폼 권력과 기술 종속이 밀고 들어옵니다. 모델과 컴퓨트는 국경 밖 소수에게 모이고, 데이터는 나가고 값은 올라갑니다. 공공서비스마저 빌린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이는 동아시아의 사회들이 정도의 차이를 두고 함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쪽에서 눌리는 것이 공동체라면, 답의 단위도 공동체여야 하겠지요. 한국에는 이미 마련되어 있는 자산이 몇 가지 있습니다. 광장의 경험, 곧 함께 결정해 본 기억이 있고, 두터운 시민사회와 협동조합·사회연대경제가 있습니다. 디지털 접근성이 높고 시민기술도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으며, 공공이 시민참여 플랫폼을 직접 운영해 온 이력도 있습니다. 다만 자산이 있다는 것과 그 자산이 실현되었다는 것은 층이 다릅니다. 자산은 조건이고, 실현은 그다음의 일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더해야 하는가. 저는 세 겹으로 봅니다. 민주주의(by)는 누가 결정하는가를 묻고, 공공재(of)는 누가 소유하는가를 묻고, 기본서비스(for)는 누구의 삶이 두터워지는가를 묻습니다. 세 겹이 함께 서야 하고, 하나만으로는 무너집니다.
민주주의 — 결정에 시민의 자리를
민주주의는 두 방향으로 갑니다. 시민의 자리를 만드는 일, 그리고 이미 열려 있는 결정의 방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먼저 시민의 자리입니다. 디지털 시민 광장은 누구나 말을 꺼낼 수 있는 열린 자리이고, 빠띠는 2015년부터 이 광장을 지어 왔습니다. 이 광장에서 시민이 스스로 의제를 세우고, 팩트체크넷에서 함께 사실을 확인하며, 별별대화 같은 프로그램으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합니다.
광장에서 나온 말이 제도에 닿으려면 여러 갈래의 자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다층적 시민협력플랫폼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구조입니다. 이름에서 ‘참여’를 ‘협력’으로 바꾼 데 뜻을 담았습니다. 참여가 의견을 내는 데까지라면, 협력은 정책을 함께 만들고 실행하는 데까지 갑니다. 다층이라는 말은 셋을 함께 가리킵니다. 방법의 층은 의제의 성격에 따라 시민 제안·전문가 토론·미니 퍼블릭·시민 대화·시민의회 가운데 알맞은 방식을 골라 쓰는 것이고, 자리의 층은 지역에서 자란 의제가 국가 의제로 올라가고 국가 의제가 지역의 맥락으로 내려오도록 잇는 것이며, 단계의 층은 제안에서 숙의로, 숙의에서 정책화와 아카이브로 흐름이 끊기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빠띠의 데모스X가 이 구조를 담은 가이드이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교육청,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같은 모델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실무의 핵심은 제도화입니다. 한국에는 민원과 제안, 청원과 참여예산, 정보공개청구와 리빙랩이 이미 다 있습니다. 시민에게는 비슷해 보이는 이 제도들이 법과 소관 부처로 갈라져 따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도화가 먼저 할 일은 흩어진 것을 서로 잇는 일입니다.
법까지 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겪었습니다. 서울시 민주주의 서울은 공감 50명에서 부서가 답변하고, 500명에서 공론장을 열고, 5,000명이 토론하면 시장이 답하는 절차를 세워 실제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단계로 준비했던 참여 자격 확대와 기관 통합은 시장이 바뀌면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중앙정부 쪽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플랫폼의 이름과 성격이 달라집니다. 좋은 설계가 기관의 의지 위에만 얹혀 있으면 이렇게 됩니다. 제도를 잇는 일과 그 운영이 다음 정부로 이어지는 일을 법이 붙들어야 합니다.
다음은 결정의 방입니다. 국가 AI 거버넌스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시민사회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고, 영향받는 사람들이 결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자문과 의견 수렴을 넘어 구속력 있는 단계에 자리가 있어야 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그 자리와 논의가 이어져야 합니다. 시민참여기본법과 국가시민참여위원회 논의가 그 자리를 제도로 만드는 길입니다.
다만 제도만 다듬으면 시민의 자리가 국가의 절차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시민이 스스로 여는 공론장을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 제도화와 나란히 가야 하고, 그러려면 그 광장을 누가 소유하는지가 다시 문제가 됩니다. 정부에도 자본에도 포획되지 않는 소유 구조 위에 설 때 시민 공간이 단단해집니다. 협동조합과 사회연대경제, 디지털 커먼즈를 저희가 붙들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공공재 — 무엇을 함께 소유하고, 무엇을 함께 만드나
공공재가 이 이야기의 무게중심입니다.
공동의 방향은 이미 세워져 있습니다. 2025년 7월부터 사회연대경제 조직들이 「적정 디지털 전환 생태계 조성을 위한 공동선언문」에 함께 서명해 왔고, 선언문은 디지털 기술을 시민의 권한을 확장하는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자고 적고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 세운 방향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소유했는지는 AI 스택으로 보면 또렷해집니다. 서비스 층은 가능성이 보이는 자리입니다. 미디어와 시민협력플랫폼, 돌봄과 에너지 같은 영역에서 시민이 만든 서비스가 돌아가고 있고, 모델을 가지지 못한 공동체가 먼저 손댈 수 있는 층이기도 합니다. 다만 확보했다고 말하기에는 이릅니다. 데이터 층은 절반쯤 왔습니다 — 공공데이터 개방은 상당히 진행됐고 공익데이터는 이제 시작입니다. 모델 층과 컴퓨트 층은 아직 없습니다.
여기서 결론이 하나 나옵니다. 소유해도, 클로즈드 인프라 위에 서면 결국 종속됩니다. 협동조합이 데이터를 소유해도 그 데이터가 도는 모델과 컴퓨트가 국경 밖 소수의 것이라면, 소유는 명목에 그치고 맙니다. 이 지점이 뒤에서 말씀드릴 국제 협력의 이유가 됩니다.
누가 소유하는가는 두 층위로 봅니다. 사용자 데이터 주권은 내 데이터에 대한 개인의 통제권이고, 지역 데이터 주권은 그 지역의 데이터에 대한 지역의 통제권입니다. 이 둘을 담을 그릇으로 저희는 공익데이터를 제3영역으로 세우는 제도 개선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공공데이터와 산업데이터에 이은 세 번째 영역이고, 유럽의 데이터 거버넌스법(DGA)이 참조점입니다. 아직 만들지 못한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데이터 협동조합도, 데이터 신탁도 한국에는 아직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풀고 있는 문제입니다.
앞에서 네 개의 힘 가운데 축적을 말씀드렸는데, 이 대목이 그 힘의 자리입니다. 논의와 데이터는 쌓이지만 그 쌓인 것을 누가 갖는지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플랫폼이 바뀌면 기록도 함께 사라지고, 다음 논의는 매번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축적을 공동의 자산으로 만드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제작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첫 갈래는 시민기술과 공익기술의 활성화입니다. 코드포코리아와 시민 실험실에서 시민이 직접 만들어 공유지로 푸는 기술이 자라 왔습니다. 2020년의 마스크앱이 그 원형입니다. 정부가 사흘 만에 실시간 API를 열었고, 그 위에서 시민 개발자들이 앱과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개별 프로젝트를 넘어 생태계로 가는 일입니다. 사람을 기르고, 지역에 거점을 두고, 결과를 공유지에 남기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적용은 열세 영역으로 펼쳐집니다. 노동과 돌봄, 의료와 교육, 미디어와 행정, 환경과 주거처럼 삶이 놓이는 자리 모두입니다. 열세 영역에 같은 세 물음이 놓입니다. 누가 만들고, 누구의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노동을 예로 들면, 같은 자동화라도 사람을 밀어내는 쪽과 사람의 일을 넓히는 쪽이 있고 어느 쪽에 지원이 가는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이 말하듯, 기술의 경로는 선택이 만듭니다.
마지막 갈래는 이익이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데이터 배당과 알고리즘 지대 환수는 사전분배, 곧 소유 구조 안에 분배를 미리 넣어 두는 방식입니다. 후생을 선의에 맡기지 않는 방법이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본서비스 — 권리로 보장되는 디지털
한국의 기본사회 논의는 소득과 주거, 돌봄과 의료까지 왔습니다. 디지털은 아직 빈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기본서비스를 어디에 세우는지가 중요합니다. 빌린 토대 위에 세우면 값과 조건은 밖에서 정해지고, 언제든 회수될 수 있습니다. 권리로 보장한다고 선언해도 그 권리가 서 있는 바닥이 남의 것입니다. 자기 토대 위에 세우면 공동체가 소유한 인프라 위에 서게 됩니다. 값과 조건을 함께 정하고, 그 운영을 맡을 주체가 디지털 사회연대경제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모두를 위한 AI 기본사회 추진계획」 수립이 진행 중입니다. 노동과 복지, 교육과 금융, 문화와 안전과 환경을 아우르는 계획이고, 민간 참여와 사회적 공론장의 숙의를 요건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 계획 안에 디지털의 자리를 넣는 일이 지금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기본사회 논의와 함께 디지털 사회연대경제(DSSE) 정책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사회연대경제기본법의 시행령과 기본계획을 세우는 국면도 그 내용을 담을 또 하나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용 利用 · 후생 厚生 · 정덕 正德
여기서 제가 정리해 온 잣대를 하나 꺼내 보겠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 특히 북학파의 세 마디입니다.
이용 利用은 쓸모와 효율과 생산성입니다. 그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후생 厚生은 두터운 삶과 공동 번영입니다. 그 기술이 삶을 두텁게 하는가를 묻습니다. 정덕 正德은 바른 자리와 바른 관계입니다. 그 두터움을 누가 소유하고 결정하는가를 묻습니다.
실학은 이 세 가지를 함께 물었습니다. AI에도 같은 세 물음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겹이 이 세 물음과 겹칩니다. 후생은 기본서비스로, 정덕은 민주주의와 공공재로 갑니다. 접근권과 역량, 사회문제 해결, 윤리는 시민사회가 오래 말해 온 것들입니다. 그 노력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소유와 거버넌스를 한 겹 더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용은 우리 모두 이미 잘합니다. 이제 후생과 정덕을 함께 세우는 일이 남았습니다.
지금 열린 창
몇 개의 창이 함께 열려 있습니다.
제도의 창이 먼저입니다. 국가 인공지능 행동계획에 AI 민주주의 계획이 추가되었고, 시민참여기본법과 국가시민참여위원회 논의가 열려 있습니다. 공익데이터를 제3영역으로 세우는 일은 데이터 법제 개선 국면에 걸쳐 있고, 기본사회 논의와 사회연대경제기본법, 디지털 SSE 정책이 한자리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시간의 창도 있습니다. 2027년은 민주화운동 40주년이고, 같은 해에 교황 방한과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있습니다. 2028년에는 G20이 한국에서 열립니다. 세 자리가 잇달아 오는 셈이고, 세계가 한국을 보는 해들입니다. 그때 무엇을 들고 갈지는 지금 정해집니다.
다만 하나를 함께 적어 둡니다. 그릇을 만드는 일과, 그 그릇을 누가 채우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제도가 열려도 그 안을 시민사회가 채우지 않으면 다른 것이 채웁니다. 그래서 할 일을 셋으로 잡고 있습니다. 참여를 제도로. 소유를 데이터와 플랫폼과 알고리즘까지. 기본서비스를 자기 토대 위에.
함께 만들 것
마지막으로 국경을 넘는 이야기를 드리려 합니다.
이 답은 한 나라 안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앞에서 본 AI 스택이 그 이유입니다. 서비스 층은 한 나라 안에서 지을 수 있고, 모델과 컴퓨트 층은 국경 밖에 있습니다. 각자의 사회에서 아무리 잘 지어도 그 아래가 소수의 클로즈드 인프라라면, 우리는 결국 같은 종속을 나눠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드립니다. AI를 민주화하는 글로벌 얼라이언스를 함께 만듭시다. Global Alliance for Democratic AI — 공동 소유 · 공동 운영 · 공동 향유 (ownership, governance and shared prosperity).
ownership · 공동 소유는 공유지입니다. 데이터와 도구와 모델을 함께 쓰고 함께 소유하는 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governance · 공동 운영은 공동의 기준입니다. AI 거버넌스에 시민이 참여하는 최소 요건을 함께 정하는 일입니다. shared prosperity · 공동 향유는 각자의 사회에서 기본서비스가 자기 토대 위에 설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2027년 민주화운동 40주년, 2028년 G20 한국. 그 자리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말
여기 적은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추진 중이고, 데이터 협동조합처럼 시작도 못 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아직 풀고 있는 문제이니, 함께 볼 만한 지점이나 고쳐야 할 대목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보실 만한 것으로 데모스X 운영 가이드, 적정 디지털 전환 생태계 조성을 위한 공동선언문, 그리고 디지털 시민 광장 빠띠를 걸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