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장에서 시작했다
한국 시민에게 광장은 오래된 단어다. 그러나 그 광장은 한 번도 같은 모습이었던 적이 없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 시민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광장으로 모였고, 그때마다 광장의 언어를 바꿔 왔다.
1980년대, 군사 정권의 폭력에 맞서던 시절의 언어는 화염병이었다. 그것은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절박한 저항의 도구였고, 그 시대 광장의 공기는 비장했다. 1987년 민주화를 지나며 그 언어가 바뀌기 시작했지만, 변화가 또렷한 형태를 얻은 것은 2002년이었다.
그해 여름, 월드컵 거리 응원에서 수백만 명의 시민이 광장에 모였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도시의 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충돌은 없었다. 폭력적 대치 없이도 거대한 집단적 에너지를 함께 낼 수 있다는 것을, 시민들은 그 여름에 몸으로 익혔다. 광장은 더 이상 비장한 전장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드는 축제의 공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겨울, 그 광장은 다시 한번 모습을 바꾼다. 미군 장갑차에 목숨을 잃은 두 여중생 — 효순이와 미선이 — 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다. 이번에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촛불이었다. 한국에서 촛불집회라는 형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월드컵의 광장이 평화롭게 모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그해 겨울의 촛불은 그 모임이 애도가 되고, 함께 슬퍼하는 일이 곧 정치적 의사표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촛불은 한국 시민이 위기의 순간마다 드는 언어가 되었다. 2008년에도, 2016년에도 시민들은 점점 더 또렷하게 비폭력을 택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광장이 곧 안전한 광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정부는 거리를 컨테이너 장벽으로 막아섰고 — 시민들은 그것을 ‘명박산성’이라 불렀다 — 광장은 과잉한 진압에 부딪혔다. 2015년 한 집회에서는 한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졌고,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든 충돌을 통과하면서, 한국의 광장은 점점 더 비폭력 쪽으로 무게를 옮겨 갔다. 거저 주어진 평화가 아니라, 대가를 치르며 시민들이 한 걸음씩 선택해 온 문화였다. 비폭력의 연대가 거대한 권력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한국 시민들은 그렇게 경험으로 배워 왔다.
그리고 가장 최근, 2024년 겨울. 한밤중에 계엄이 선포되고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을 때, 그들의 손에는 응원봉이 들려 있었다. 아이돌 콘서트에서 쓰던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한겨울의 거리를 밝혔다. 하나의 구호, 하나의 깃발로 통일되지 않은 풍경이었다. 저마다 다른 빛깔을 든 개인들이, 각자의 개성을 지운 채 하나의 대오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채로 함께 모여 있었다. 느슨하지만 단단한 연대였다.
화염병에서 촛불로, 촛불에서 응원봉으로. 이 변화는 한국 민주주의가 무엇을 쌓아 왔는지를 보여준다. 시민들은 함께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감각 — 시민적 효능감 — 을 40년에 걸쳐 축적해 왔다. 그리고 그 효능감은 점점 더 평화로워지는 동시에, 점점 더 다양한 개인을 그 자체로 품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획일적인 단결을 넘어, 다름을 안은 연대로.
그런데 한국 시민이 광장에서 보여 온 것은 권력에 맞서 모이는 일만이 아니었다. 위기 앞에서 서로를 위해 자기 것을 내어놓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은 지진이나 거대한 자연재해로부터는 비교적 안전한 땅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재난은 한 세대 안에 거듭 닥쳤다. 외환위기와 경제의 붕괴, 분단이 만들어 내는 안보의 불안, 권위주의의 반복, 그리고 끝내 한밤의 계엄까지. 자연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의 구조에서 비롯된 재난들이었다. 자연재해 앞에서 시민은 대비하고 복구할 뿐이지만, 사회적 재난은 그 원인이 사회 안에 있기에 시민이 함께 맞설 수 있고, 또 맞서야만 하는 것이 된다. 한국 시민이 유독 광장의 시민이 된 것은 어떤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거듭 닥친 위기의 성격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함께 모여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가, 시민들을 자꾸 광장으로 불러냈다.
그 위기 앞에서 시민들은 맞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어놓기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시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장롱 속 금붙이를 들고 줄을 섰다. 함께 어려움을 넘자며 자기 것을 보탠 것이다. 저항의 효능감 곁에는 늘 이런 호혜의 마음 — 서로를 향한 정(情)과, 함께 무언가를 해내는 흥이 함께 있었다. 한국의 광장은 맞서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내어놓는 자리였다. 이것이 한국 시민이 광장에서 배운 것이고, 뒤에 이어질 모든 이야기의 바탕이다.
그런데 광장은 거리에만 있지 않았다.
디지털 광장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1990년대, 아직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 하이텔과 천리안 같은 PC통신의 시대에 한국 시민들은 이미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파란 글자만 깜빡이던 그 텍스트 화면 안에서는 나이도, 직업도, 성별의 위계도 흐려졌다. 익명의 개인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공적인 주제를 토론했다. 신문과 방송이 독점하던 의제 설정의 권한이, 처음으로 평범한 시민의 손으로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한국 시민들은 디지털 공간에서 수평적으로 토론하는 법을 그때 익혔다.
2000년대, 초고속 인터넷이 빠르게 퍼지면서 그 경험은 훨씬 큰 광장으로 자라났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아고라’다. 나는 그 시절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일하며 아고라의 개발을 맡았다. 아고라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발명품이 아니라, PC통신 시대부터 이어져 온 그 토론 문화가 더 넓은 장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시민들이 토론하고, 서명을 조직하고, 여론을 모으는 —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온라인 광장이었다.
같은 시기, 디지털 광장의 또 다른 모습도 자라나고 있었다. 시민이 직접 쓰는 저널리즘이었다. 2000년, ‘오마이뉴스‘가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기자가 되어 기사를 쓰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오마이뉴스는 증명했다. 곧이어 블로그의 시대가 왔다. 누구나 자기 블로그에 세상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목소리를 냈다. 나는 다음에서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다음 블로거뉴스'(이후 다음뷰)는 블로거들이 쓴 글이 곧 뉴스가 되는 시민 미디어 서비스였고, ‘티스토리’는 시민들이 자기 미디어를 직접 소유하고 운영하는 블로그 플랫폼이었다. 나는 이 서비스들의 기획과 개발에 참여했다. 전문 언론이 독점하던 ‘기사를 쓰는 일’, ‘의제를 발굴하는 일’이 평범한 시민에게로 분산되던 시기였다.
토론이든 저널리즘이든, 그 바탕에는 같은 정신이 있었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누구나 공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 시절 인터넷이 품었던 약속이었고, 디지털 광장은 그 약속 위에 서 있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거리의 광장과 아고라라는 디지털 광장은 거의 완벽하게 맞물려 움직였다. 온라인의 토론이 거리로 사람들을 불러냈고, 거리의 열기가 다시 온라인의 담론을 달궜다. 디지털 광장이 물리적 광장을 끌어당기고, 물리적 광장이 디지털 광장을 다시 채우는 — 두 광장의 공진을, 나는 그때 처음 목격했다.
그러나 아고라는 지금 없다.
거대했던 그 디지털 광장은 서서히 쇠퇴했고, 결국 사라졌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사실은 하나였다. 아고라는 한 기업의 것이었다. 시민들이 그 안에서 토론하고 연대하고 역사를 만들었지만, 정작 그 광장의 운명을 시민이 결정할 수는 없었다. 기업의 사정이 바뀌고 플랫폼 환경이 변하자, 수많은 시민이 함께 쌓아 올린 그 거대한 공론장은 시민의 동의 없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아고라가 이른바 댓글 부대의 여론 조작과 검찰 조사 속에서 위축되어 가는 것을 나는 가까이서 지켜봤다. 시민이 만들고 시민이 채웠지만, 끝내 시민의 것은 아니었던 광장. 그것이 아고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경험이 나에게 남긴 질문은 의외로 단순했다. 정치 권력으로부터도, 자본으로부터도 독립된 시민의 광장은 정말 불가능한가. 시민이 직접 소유하고, 직접 운영하는 디지털 광장은 만들 수 없는가.
2015년, 나는 그 질문을 안고 사회적협동조합 빠띠(Parti)를 만들었다. 빠띠가 하는 일은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다. 시민이 대화하고 행동하는 디지털 광장을 만드는 것. 시작은 하나의 바람이었다. 시민들이 안전하게 의견을 내고, 서로 다른 생각을 모으고, 그것을 캠페인과 숙의로 이어 갈 수 있는 공간 —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광장 하나를 갖고 싶었다. 그 작은 출발점에서, 내가 미처 내다보지 못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2. 광장에서 거버넌스가 자라났다
빠띠를 만들면서 분명히 세운 원칙은 “시민의 광장이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자기 의제를 꺼내 놓고, 서로 다른 생각을 모으고, 캠페인과 숙의로 이어 가는 공간 — 그 광장 자체가 빠띠가 지키려는 핵심이었다. 동시에 나는 정부와 기관이 더 시민에게 열린 방향으로 변하도록 돕는 일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만 그 협력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놓지 않은 경계심이 있었다. 시민의 광장을 기업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정부에 의존하는 것도, 결국 그 광장을 시민의 손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경계심이었다. 아고라가 가르쳐 준 교훈이었다.
그리고 그 광장은 온라인에만 있지 않았다. 빠띠는 10여 년 동안 매달 많으면 20회가 넘는 오프라인 공론장과 리빙랩, 시민 워크숍을 현장에서 직접 열어 왔다. 시민들이 실제로 마주 앉는 자리를 만들고, 무엇이 대화를 살리는지를 그 자리에서 몸으로 배웠다. 빠띠의 디지털 도구들은 모두 이 현장 경험에서 자라났다. 실천이 먼저였고, 도구는 그 실천을 담으려 뒤에 왔다.
이 원칙과 이 경계심을 함께 쥐고 일하는 동안, 시민의 광장은 거리와 온라인에만 머물지 않고 제도 안으로도 이어졌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민 참여의 제도를 한 단계씩 쌓아 오고 있었다. 2005년의 국민신문고가 흩어진 민원을 하나의 창구로 모았고, 이후 국민청원이 시민의 의제 설정 권한을 제도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진화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었다.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열려는 대통령이나 지역 단체장이 등장할 때마다, 시민 참여의 제도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광장에서 분출하는 시민들의 에너지를 일회적인 함성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지속적인 제도로 옮기고 싶어 한 사람들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안에 늘 있었던 것이다.
데모스X는 그 흐름과 빠띠가 만나는 자리에서 태어났다. 2015년에 막 출범한 빠띠는 그때 아직 초기 단계였고, 이런저런 시도를 열심히 이어 가던 참이었다. 광장의 에너지를 제도로 만들고자 한 선출직 공무원들이 주목한 것은, 내가 그 이전 20년 동안 디지털 광장을 만들어 온 경험 — 아고라를 비롯한 시민 광장의 경험이었다. 시민들이 온라인에서 토론하고 의제를 모으는 그 방식을 자신들도 시정과 국정에 들이고 싶다며, 그들은 나를, 그리고 빠띠를 초대했다.
서울시의 ‘민주주의 서울’이 그렇게 시작됐다. 시민이 정책을 제안하고, 일정한 규모의 공감을 얻으면 시민과 전문가와 공무원이 함께 토론하고, 그 결과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 — 제안에서 숙의를 거쳐 정책에 이르는 한 흐름을, 빠띠는 그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다. 중앙정부의 ‘광화문1번가’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광장의 에너지를 제도로 옮기고 싶었던 이들과, 시민의 광장을 만들어 온 우리가 만나 — 제안과 숙의와 결정으로 이어지는 시민협력의 프로세스를 함께 빚어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빠띠는 그 경계심을 다시 꺼냈다. 정부와 함께 만든 이 시민협력플랫폼이 정부의 것으로만 묶이면, 그것은 아고라의 길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정권이 바뀌거나 담당 부서의 판단이 달라지면 플랫폼 전체가 사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빠띠는 이 플랫폼을 ‘데모스X’라는 이름의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150회가 넘는 공론장을 운영하며 쌓은 경험과 운영 가이드까지 함께 열었다. 정부와 협력해 만들었지만, 그 결과물은 정부에만 속하지 않도록 — 누구나 가져다 자기 시민협력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공유지로 풀어 둔 것이다. 실제로 데모스X는 서울을 넘어 부산을 비롯한 다른 지방정부와 교육청, 여러 기관으로 퍼져 나갔다. 한 도시의 시스템이 아니라, 시민협력의 공통 기반이 되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의 ‘마스크 앱’은 또 다른 방식의 자라남을 보여준다. 전국적인 마스크 품귀로 시민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빠띠의 활동가를 비롯한 시민 개발자들은 정부에 마스크 재고 데이터를 공개된 형식으로 개방해 달라고 먼저 요청했다. 정부가 그 요청을 받아들여 데이터를 열자, 200명이 넘는 시민 개발자들이 사흘 만에 마스크 재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50개가 넘는 무료 앱과 서비스를 만들어 냈다.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어느 한쪽의 역량 때문이 아니었다. 시민사회 쪽에는 데이터를 다루고 서비스를 만들 줄 아는 시민 기술의 축적이 있었고, 정부 쪽에는 공공데이터를 개방해 본 경험과 제도가 쌓여 있었다. 민간과 정부 양쪽에 시민 기술의 기반이 함께 있었기에, 위기의 순간에 그 둘이 맞물려 작동할 수 있었다. 누가 위에서 기획한 협업이 아니었다. 양쪽에 준비된 토양이 있었기에 자라난 결과였다.
거버넌스는 거리의 광장에서도 자라났다. 2024년 겨울 계엄과 그 이후,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 빠띠는 그 광장의 목소리를 디지털 공론장으로 모으는 일을 했다. 비상행동과 함께 ‘천만의 연결‘이라는 프로젝트를 운영했다. 거리에 직접 나오지 못한 시민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의견을 남기고 제안할 수 있도록 한 공론장이었다. 전국 1,700여 개 단체가 모인 비상행동이 발굴한 사회대개혁 의제와 시민들이 남긴 목소리를 함께 모아, 118개의 과제로 정리해 각 정당에 전달했다. 한겨레와 함께한 ‘한국의 대화‘는 또 다른 결의 실험이었다. 사회 현안에 대한 답이 가장 다르게 나온 시민들을 짝지어, 서로 마주 앉아 대화하게 하는 자리였다. 상대를 논박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를 듣는 데 초점을 둔 대화였다. 독일의 한 실험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한 이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시민들이 실제로 마주 앉으면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데모스X, 마스크 앱, 천만의 연결, 한국의 대화 — 이들은 빠띠가 거버넌스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먼저 그리고 거기에 시민을 채워 넣은 것이 아니다. 순서는 늘 반대였다. 시민의 광장이 먼저 있었고, 시민들이 그 안에서 실제로 대화하고 행동했고, 그 위에서 정부와 시민이 만나는 거버넌스가 자라났다. 빠띠가 지킨 것은 그 광장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두는 원칙, 그리고 그것을 기업에도 정부에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경계심이었다. 거버넌스는 그 원칙과 경계심 위에서 돋아난 것이다.
이것을 나는 공진(共進)이라 부른다. 시민과 정부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설계하거나 지배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밀고 당기며 함께 자라는 일. 한국의 디지털 민주주의는 그렇게 공진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자라난 것은 흔들리기도 했다.
3. 그러나 광장은 흔들렸다
2장에서 말한 그 패턴 — 시민에게 귀를 여는 정부가 들어설 때 시민 참여의 제도가 한 걸음씩 나아갔다는 것 — 에는 어두운 짝이 있다. 정부가 바뀌면, 그 제도는 한 걸음씩 뒤로 밀린다. 자라난 것은 자라난 그 자리에서, 다시 흔들렸다.
빠띠가 그것을 가장 아프게 겪은 일이 팩트체크넷이다.
팩트체크넷은 2020년, 허위 정보에 맞서는 독립적이고 공적인 팩트체크의 기반을 만들자는 제안에서 출발했다. 기자협회를 비롯한 언론 현업 단체들과 함께였다. 시민이 질문을 던지고, 시민과 전문가와 언론인이 함께 사실을 검증하는 — 집단지성과 저널리즘의 원칙을 결합한 열린 플랫폼이었다. 2년여 동안 1,700명이 넘는 시민 팩트체커와 전문가가 참여해 400건이 넘는 검증 콘텐츠를 만들었다. 팩트체크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품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팩트체크넷은 시작 전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정권이 바뀌자 공격은 제도의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팩트체크넷에 기금을 지원했던 공공기관에 표적 감사가 들어왔고, 그 끝에 빠띠에는 7억 5천만 원이 넘는 환수금과 제재부가금이 부과됐다. 도서 구매 내역과 주차요금 정산 같은 사소한 항목까지 문제 삼은 감사였다. 빠띠는 협약된 기준에 따라 사업비를 집행했고 중간 점검에서도 문제가 없었지만, 감사는 사업 진행 시와 다른 기준을 제시했다. 함께 시작했던 언론 단체들의 회장단이 바뀌고 예산이 줄면서, 팩트체크넷은 2023년 결국 해산됐다. 비슷한 시기, 청년들이 성평등 의제를 발굴하고 캠페인을 만들던 빠띠의 또 다른 사업 ‘버터나이프크루’도 “페미니즘에 경도됐다”는 정치적 문제 제기 속에 중단됐다. 윤석열 정부의 3년 동안 빠띠의 활동은 쪼그라들었다. 직원은 마흔 명에서 스무 명으로 줄었고, 급여도 절반이 되었다.
이 일을 겪으며 나는 20년 전을 자주 떠올렸다.
1장에서 아고라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때 나는 아고라가 기업의 것이어서 사라졌다고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고라가 가장 활발하던 시절, 그 거대한 광장은 이른바 댓글 부대의 여론 조작과 검찰 조사 속에서 위축되어 갔다. 시민의 광장이 권력에 의해 좁혀지는 것을, 나는 20년 전에 이미 한 번 지켜봤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내가 만든 빠띠가 같은 일을 겪었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을 나는 그렇게 몸으로 알았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보게 되었다. 우리가 겪은 것은 독재 시대의 노골적인 폭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사라는 제도, 환수금이라는 제도, 적법한 절차라는 외피. 세계의 민주주의는 인권을 쟁취하는 단계에서 그 인권을 법과 시스템으로 떠받치는 제도의 단계로 넘어왔다. 한국도 그 길을 걸어 제도를 갖춘 민주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제도가, 시민의 공론장을 겨누는 칼이 될 수 있었다. 제도적으로 완성된 민주국가에서도 — 아니, 어쩌면 제도적으로 완성되었기에 더 정교하게 — 권력은 합법의 이름으로 시민의 광장을 조일 수 있었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겪은 어려움이고, 동시에 지금 많은 민주국가가 마주한 어려움이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제도가 양날의 칼이라면, 제도를 버려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지점이, 빠띠가 왜 지금의 형태를 고집하는지를 설명한다.
제도가 권력의 손에 있을 때 흔들린다면, 제도를 시민의 손으로 옮기면 된다. 광장이 기업의 것이어서 사라지고 정부의 것이어서 표적이 된다면, 광장을 시민이 직접 소유하면 된다. 빠띠가 사회적협동조합인 것은 그래서다. 사회적협동조합은 시민 조합원이 함께 소유하고 함께 운영하는 조직이다. 특정 자본가의 것도, 특정 정권의 것도 아니다. 빠띠가 운영하는 광장의 주인은 빠띠에 속한 시민들이고,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도 그들이다. 데모스X를 오픈소스 공유지로 풀어 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정부와 함께 만들었지만 정부에만 묶이지 않도록,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공동의 자산으로 열어 둔 것. 정권이 하나의 플랫폼을 닫을 수는 있어도, 이미 여러 도시와 시민사회로 퍼져 공유지가 된 코드와 경험까지 닫을 수는 없다.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길에 가깝다. 빠띠는 조합원들이 빌려준 돈으로 위기를 버텨야 했다. 직원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동안에도, “돈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민 플랫폼을 다시 만들어 내놓았다. 기업으로 만들었다면 자본을 더 쉽게 모았을 것이고, 정부 사업에 더 깊이 기댔다면 당장은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시민이 소유하는 광장이라는 길은, 느리고 가난하고 위태롭다. 그러나 두 번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는 안다. 빠르고 풍족하고 안정적인 다른 길들은, 결국 그 광장을 시민의 손에서 떠나보내는 길이었다. 어렵다는 것은 이 길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빼앗기지 않는 것에는 원래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흔들림의 한 장이 닫히고 있다. 2026년 6월,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직권 재심의를 거쳐 빠띠에 부과됐던 7억 원이 넘는 제재부가금 처분을 취소하고 수사 의뢰도 철회하기로 했다. 빠띠가 담당 기관과 사전에 협의해 사업을 정상적으로 집행했고, 이전의 감사가 그 과정을 충분히 살피지 않았다는 사실이 공식으로 확인된 것이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온,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처분이 취소되어도 그 사이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떠났고, 공론장 하나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나는 이 회복이 한 조직의 회복을 넘어, 권력이 제도의 이름으로 시민의 공론장을 조이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구조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12·3 계엄과 그 이후,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로를 위한 디지털 도구를 자발적으로 만들어 냈을 때 — 나는 거기서 다시 희망을 보았다. 위기의 순간에 시민들은 국가나 거대 플랫폼을 기다리지 않았다.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연결했다. 그 에너지가 일상의 광장을 시민의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 이어진다면, 흔들림은 끝이 아니라 다음 광장의 시작이 될 수 있다.
4. 다음 광장
12·3 계엄의 밤, 그리고 그 이후의 겨울 동안, 나는 한국 시민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봤다. 그들은 거리로 나왔고, 동시에 무언가를 만들었다. 계엄 상황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사람, 허위 정보를 빠르게 검증하는 사람, 집회 정보를 모아 지도에 표시하는 사람.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위기의 순간에 시민들은 국가의 지시도, 거대 플랫폼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았다. 스스로 도구를 만들고 서로를 연결했다.
이것이 한국 시민이 광장에서 보여 온 힘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힘이 저절로 다음 광장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선 자리에는 AI가 있다. AI는 디지털 광장의 모습을 다시 바꿀 것이다. 수만 명의 시민 의견을 실시간으로 분류하고, 긴 토론의 쟁점을 요약하고, 언어가 다른 시민들을 잇는 일 — 이런 자리에서 AI는 시민의 숙의를 돕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빠띠도 그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히 그어야 할 선이 있다. AI가 시민의 대화를 돕는 것과, AI가 시민의 대화를 대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최근에는 시민 개개인의 데이터를 학습해 그를 닮은 AI를 만들고, 그 AI들끼리 토론하게 해서 사회적 합의를 시뮬레이션하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기술로는 흥미롭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것은 핵심을 비운다. 민주주의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합의라는 결과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민이 마주 앉아 설득하고 설득당하며 때로 생각을 바꾸는 그 과정 자체다. 그 과정에서 시민은 결정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공동체는 신뢰를 쌓는다. 내 AI가 합의에 참여했다고 해서 내가 그 결과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실제 시민의 대화가 빠진 합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외양을 한 계산일 뿐이다.
이 대체는 누가 결단해서 오지 않는다. 표류로 온다. 누구도 “시민의 숙의를 폐지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AI가 보조 도구로 들어오고, 빠르고 깔끔하니 점점 더 많은 단계를 맡고, 어느 순간 시민의 진짜 대화는 형식적으로 한 번 거치는 절차로 쪼그라든다. 각 단계는 합리적인데 그 총합은 대체인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지금의 공론 제도가 형식적이고 부실했다는 사실이 이 대체를 정당화하는 데 쓰일 거라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약이 있다. 기존 제도가 부실했던 것은 시민이 너무 많이 참여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참여하지 못해서다. 결함의 방향이 참여의 부족인데, 그 처방으로 참여를 더 덜어내는 자동화를 들이는 것은 진단과 처방이 어긋난 일이다. 부실한 숙의가 요구하는 것은 더 두꺼운 숙의이지, 숙의의 폐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음 광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나는 그것이 더 많은 참여와 더 나은 협력으로, 민주주의가 일상이 되는 광장이기를 바란다. 투표가 몇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특별한 날의 행사가 아니라, 시민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되는 것. 나와 관련된 의제가 어딘가에서 논의되기 시작하면 알림이 오고,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언제든 그 대화에 들어갈 수 있는 것. 그 일이 빠띠 같은 시민들의 광장에서도 일어나고, 정부가 운영하는 정책 플랫폼에서도 일어나는 것. 거리의 광장이 특별한 위기의 순간에 열린다면, 다음 광장은 위기가 아닌 평범한 날에도 늘 열려 있는 광장이다. 민주주의가 선거철에만 작동하는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하루 안에서 계속 살아 숨 쉬는 무엇이 되는 것 — 그것이 일상의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이 광장을 누가 소유하고, 누가 다스리는가.
이 글에서 나는 두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이야기했다. 제도가 권력의 손에 있어 정권에 따라 흔들렸고, 기술이 기업의 손에 있어 자본의 논리에 따라 휘었다. 그러나 흔들렸다고 해서 제도와 기술을 버릴 수는 없다. 제도가 없으면 시민의 목소리는 일회적인 함성으로 흩어지고, 기술이 없으면 디지털 시대의 광장 자체가 서지 못한다. 우리는 제도도 기술도 여전히 필요로 한다. 다만 그 둘의 힘이 시민에게 있어야 한다. 제도는 권력이 아니라 시민이 소유할 때, 기술은 자본이 아니라 시민이 소유할 때 — 비로소 흔들림을 견디고 제 몫을 한다. 한국은 발전한 디지털 국가이자 제도를 갖춘 민주국가다. 그 두 가지를 다 이룬 곳에서도 우리는 제도와 기술이 거꾸로 시민을 겨눌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같은 곳에서 우리는, 시민이 그 힘을 되찾으려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보았다. 흔들리면서도, 한국 시민들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왔다.
다음 광장은 한 나라 안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의 공론장을 위협하는 힘 — 소수 빅테크의 플랫폼 독점, 국경을 모르는 알고리즘, AI 인프라의 집중 — 은 어느 한 나라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에 맞서는 시민의 연대도 국경을 넘어야 한다. 빠띠는 한국과 대만, 일본의 시빅 해커들이 만나는 자리를 함께 만들어 왔다. 각 나라가 자기 광장을 만든 경험을 나누고, 거대 플랫폼의 힘에 함께 맞서는 일. 한국이 흔들리며 걸어온 이 길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디지털 국가이면서 민주국가인 곳들, 그리고 아직 그 길 위에 있는 더 많은 곳들이 —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해야겠다. 더 많은 참여도, 더 나은 협력도, 그 바닥에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끝내 헛돈다. 신뢰가 없는 곳에서 잦은 투표는 피로가 되고, 끊임없는 알림은 소음이 되며, 참여는 서로를 향한 각자의 외침이 될 뿐이다.
그런데 신뢰는 마음먹는다고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에서 온다. 공동체로부터 무언가를 받아 본 경험, 내가 무언가를 보태고 그것이 인정받은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삶이 안전하다는 감각. 불안에 쫓기는 사람은 곁의 시민을 신뢰하기 어렵고,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내어 줄 마음을 내기 어렵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IMF 외환위기 때 금붙이를 들고 줄을 선 시민들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한국 시민이 위기 앞에서 서로를 위해 자기 것을 내어놓은 경험의 한 장면이었다. 2020년의 마스크앱도 그 연장이었다. 사흘 만에 앱들을 만들어 낸 시민 개발자들은, 자기 능력과 시간을 동료 시민을 위해 내어놓은 것이다. 12·3의 밤에 시민들이 만든 도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받아 본 사람이 내어놓고, 내어놓은 것이 누군가에게 쓸모가 되고, 그 쓸모가 다시 인정받는 일 — 그 주고받음이 쌓일 때 신뢰가 자란다. 돌이켜 보면 빠띠가 만들어 온 광장들이 하려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민이 함께 모여 세상을 바꾼 경험, 자신이 만든 것이 이웃에게 실제로 쓸모가 된 경험, 자신의 제안이 정책이 되어 돌아온 경험 — 그 작은 경험 하나하나가 신뢰가 자라는 토양이었다.
다음 광장이 끝내 키워야 하는 것은 더 정교한 기능이 아니라, 시민들이 서로를 — 그리고 함께 만드는 결정을 — 믿을 수 있다는 그 신뢰다. 그리고 그 신뢰는, 시민이 광장에서 무언가를 받고 보태고 인정받는 경험이 쌓일 때에만 자란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한국 시민들이 거리의 광장에서 이미 외쳐 온 목소리이기도 하다. 화염병의 단일한 대오에서 촛불의 연대로, 다시 저마다 다른 빛깔의 응원봉으로 — 그 40년의 변화가 가리킨 것은 결국 포용과 연대였다.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고 품는 것, 생각이 다른 채로도 함께 설 수 있다는 것. 신뢰란 그 포용과 연대를 일상의 언어로 옮긴 말일 뿐이다. 거리의 광장이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보여주었다면, 다음 광장은 그것을 평범한 날의 구조로 이어받아야 한다. 광장은 신뢰 위에서만 광장이 되고, 신뢰는 경험 위에서만 자라며, 그 경험의 다른 이름이 포용과 연대다.
20년 전 나는 시민이 만들었지만 시민의 것이 아니었던 광장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 뒤로 줄곧 하나의 질문을 안고 걸어왔다. 디지털 세계는 누가, 어떻게 다스리는가. 빠띠가 흔들리며 걸어온 길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시민이 소유하고, 시민이 다스리는 디지털. 그것은 거리의 광장에서 시민들이 40년 동안 배운 것 — 함께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그 힘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 — 을, 디지털 세계에서 다시 짓는 일이다.
다음 광장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시민이 직접 만들고, 소유하고, 다스리는 그 과정 자체가 — 다음 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