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과 갈라치기, 입틀막과 처단으로부터 — 존중, 포용, 연대로 지켜낸 민주주의

2024년 12월 3일, 국회 의사당을 보여주는 생중계 화면에 총칼을 든 군인의 모습이 등장했을때, 많은 시민들은 그 총이 곧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실질적인 공포를 느꼈다. 실제로 계엄군이 발표한 포고령에는 ‘처단’이라는 단어가 뚜렷이 박혀 있었다.

이 정권이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전조가 있었다. 40년 전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들인 것처럼, 그들은 출범하자마자 끊임없이 사회 구성원들을 낙인을 찍고 갈라치기 했다. 이동권을 요구한 장애인들, 성평등을 실행하는 청년들, 시민사회와 노동계, 사회적경제 영역을 ‘이기적인 집단’이거나 사회를 전복하려는 ‘반사회적 세력’으로 일치감치 규정했고, 지원을 끊고, 감사와 고발로 압박했다. 대통령을 풍자한 고등학생의 그림이 수상하자 담당자는 경고를 받아야 했고, 대통령을 비판한 기자와 언론사는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시켰다. R&D 예산 삭감과 의대 정원 정책에 대한 현장의 비판에는 ‘입틀막’으로 대응했다. 선거에서 국회 다수당 구성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이 선출한 국회마저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고 무시하더니 드디어 ‘처단’에 나섰다.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출범한 정권은 결국, 자신들과 그 지지자들의 자유와 권리만을 지키려 했다. 낙인찍기는 혐오를 낳았고, 갈라치기는 배제를 낳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입틀막이라는 억압을 거쳐, 마침내 친위 쿠데타를 통한 적극적인 ‘처단’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에게 공권력은 그들을 지키는 방패이자 칼이었고, 법과 제도도 마음대로 비틀 수 있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

그 폭력의 빌드업을 시민들이 최종적으로 막아냈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혐오에 맞서 연대하며, 법과 제도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존중하려는 집단적 의지로, 자유 민주주의의 본질을 지켜낸 시민들. 광장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연대가 필요한 순간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함께 하며 힘을 모아내며, 법이 정한 결정을 답답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순간들. 그 전에도 지난 3년간 소수자와 연대하고, 피해자와 연대하고, 내부고발자와 연대하던 순간들. 그 순간이야말로 존중, 포용, 연대의 가치가 낙인과 갈라치기와 폭력을 이겨냈고, 자유로운 구성원들이 공존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민주주의는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효율적인 체제가 아니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구성원들이 서로 공감 가능하고 수용 가능한 합의를 찾아가며 공동의 가치와 답을 세워나가는 시스템이다. 이를 위한 공통 기반이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지하며, 폭력을 동반한 억압에 함께 맞서는 자세다. 존중과 포용과 연대가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핵심 기반이다.

다행히 이번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와 함께 그 반대의 행태를 실감했다. 낙인찍기, 갈라치기, 입틀막, 처단은 민주주의 사회가 용납할 수 없음을. 서로 다름을 견디고 존중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함께 지킬 때에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음을 말이다. 무엇보다도 누군가 목소리를 내는 구성원을 사회에서 반사회세력과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고 혐오와 폭력을 가하며,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와 주장과 이익만을 옹호하려할 때, 동료 시민으로서 함께 대응하는 연대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핵심임을.

권력 앞에 자유 민주주의는 한낱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존중과 포용, 그리고 연대. 이 세 가지를 믿는 시민들이 있을 때 그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에게 실체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저들과는 다른 민주주의 사회의 진짜 주인임을 증명하는 힘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기회가 주어진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멋진 순간을 멋지게 돌파했는지 스스로를 잊지 않고, 함께 멋진 사회를 상상하는 대화와 협력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