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갈림길에 선 40대의 마음가짐 3가지

1999년에 일을 시작했고 복학기간을 제외하면 만 20년을 일했다. 10년은 회사에서 지냈고, 10년은 어설프게나마 내 사업을 했다. 운이 따라서 꿈꿨던 삶에 나름대로는 가깝게 지금까지는 지내왔다. 순간 순간은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깝지 않다는 느낌들이 훨씬 강했지만, 바라던 삶에서 멀어질 때마다 고민하며 지그재그로 어느 정도 맞춰온 것 같다. 그렇게 지내며 벌써 40년을 넘게 살았다. 인생의 절반 가량을 일하며 보낸 셈이다.

40대가 되고 보니 느끼는 것들이 꽤 있다. 우선 기억력이 옛날 같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공부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소용없다는 걸 느낀다. 공부하면 할수록 앞서 공부한 것들은 내 뇌 속에서 사라지니까. 모든 걸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제대로 알아야 할 것과 얄팍하게 알아야 할 것들을 더욱 구분해야 한다는 걸 느낀다. 꼭 필요한 것 위주로 공부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도.

두번째는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아마도 어떤 분야의 전문성을 갖추면, 전문가라는 느낌 때문에 사람들이 여러가지를 함께 물어보는데. 글쎄, 나도 모르는 일들을 질문받을 때가 점점 늘어나는게 느껴진다. 물론 일을 하면서 여러가지를 보게 되기 때문에, 내 전문분야가 아니어도 질문하는 이보다는 잘 아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정답”을 알려줄 수준은 안 될 때가 많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20년간 일하면서 지금 받은 질문을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 사람이 머릿 속에 한두명 떠오르기도 한다. 즉 나는 모르지만, 알 것 같은 사람은 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번째는 첫번째, 두번째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간 일을 해 오면서 내가 고민하고 내가 축적해온 전문성들이 사회의 그 누구보다도 깊이가 있음을 느낀다. 같은 일을 나만큼 오래 한 전문가가 사회에서 드물어지는 시기가 온 거다. 누군가가 내게 내가 해 온 일과 관련해서 묻는다면, 내가 최신 트렌드는 모를 수 있어도 지난 20년간 한 일에 대해서는 나만큼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겠다 싶다. 거기에 더해 내가 이 분야에서 깨달은 것들이 다른 분야에서도 세부 항목은 달라도 비슷하기도 하단 걸 느낀다. 사람 사는게, 세상이란게 비슷한게 많은 셈이다.

이 세가지를 조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더라.

첫째, 점점 더 내가 잘 하는 일을 넘어서 여러가지 문의들이 오게 된다. 그만큼 내가 모르고 있구나 라고 깨닫는게 점점 더 늘어나고, 내가 성급하게 답변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늘어난다. 그러니 함부로 답변하지 말자. 혹은 답변하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수준이 어느 정도임을 공유하고 답변하자. 모르거나 잊어버린 것 중에 반드시 지금이라도 알아야 할 것들은 더 깊게 공부하고, 몰라도 괜찮을 것들은 흘려 보내자.

둘째,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 사람들, 나보다 어떤 일을 더 잘 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거나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그 분야의 일가견을 이루었거나 앞으로 이룰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사회에 그 정도로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 아직 없다면 내 주변 사람들 중에 그 분야를 새롭게 파고 드는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나누고 응원하자. 정리하면 내가 아는 전문가들과 협업하거나, 그 분야를 파고들 젊은 분들과 협업하자.

셋째, 내가 지금까지 해 왔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에 더욱 더 깊게 파고들자. 누구보다도 깊은 전문성을 갖추려고 더욱 노력하고, 또 스스로도 그만큼의 전문성을 갖추었음을 믿자. 그래서 내게 맡겨진 일이나, 내게 주어지는 질문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임하도록 하자. 그리고 이 분야에서도 희미하게 보이고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삶과 세상, 우주의 기본 진리에 대해서 성찰하자.

만약 이를 조심하지 않은채 중년을 살아간다면. 잘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기회와 성과는 혼자서 독식하고, 이미 낡아버린 전문성만 갖춘 노년이 될지 모른다. 젊은이들은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부르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기술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술을 활용한 사회 혁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던 사례가 있습니다. 공적 마스크 배포 과정에서 정부, 기업, 시민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만든 앱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부는 약사들이 입력한 마스크 판매 이력을 모아 마스크 재고 현황을 공공 데이터로 공개했습니다. 네이버, 카카오, KT 등 기업은 현황 데이터를 원활하게 공개할 수 있도록 서버를 제공했고요. 시빅해커(시민개발자)들과 관련 기업들은 마스크 재고 API를 활용해 약국의 마스크 수량을 확인하는 앱을 개발했습니다. 약사들이 손으로 입력한 데이터가 시민의 손에 닿는 과정을 정부와 기업, 시빅해커가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함께 만들어낸 것이죠. 이런 일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이루어졌을까요?

중요한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이 이롭다는 정부의 방침과 재난 극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빅해커들의 열정이 상호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민주주의 혁신의 수단으로 기대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슬로건은 기술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공재나 공유재로서 다수가 기술을 함께 소유합니다. 누구나 쉽게 사용 가능한 기술을 만듭니다. 기술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기술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합니다. 기술을 활용해 더 안전하고 풍요로우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갑니다.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전망에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기술을 함께 소유하고,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며, 기술 활용으로 창출되는 부가 가치가 모두를 위해 쓰이도록 민주적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민주적 구성이 중요한 이유는 기술 활용의 낙관적인 전망의 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가능성 때문입니다. 로봇으로 대표되는 생산 수단을 일부가 독점하여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생기는 사회나, 과도한 환경 파괴와 자원 남획으로 인류 및 생태계가 멸종 위기에 처하고 기후 변화가 일어나는 사회도 우리는 예상합니다. 현대문명 기술로 서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이 때문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세계로 퍼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전망할 때 과학 기술을 원인이자 해결책으로 지목하곤 합니다. 대전염병이 인류를 멸망시키거나, 지금보다 퇴보한 사회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기술 발달로 인해 초-연결된 사회 때문이라고 분석하죠. 한편 물리적 거리두기에도 사회적 연대를 유지하는 데 화상회의, 온라인 강의 등 초-연결 기술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기술이 원인이자 해결책으로 지목되고, 그 기술의 판단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다수가 기술에 접근하고 기술을 만들고 소비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술에 접근하는 순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최첨단 기술이 펼쳐질 미래를 상상할 때, 기술의 활용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제는 기술이 다수를 위해 활용되도록, 기술을 함께 소유하고 기술에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와 함께 지속해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음 원칙들에 대한 지속적인 합의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기술이 발전하기 위한 6가지 원칙 

1.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기술 개발
2. 정부 및 기업 데이터를 모두가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공유
3. 특별한 소수가 아닌 평범한 다수를 위한 플랫폼 서비스 제작
4. 플랫폼에 가치를 더하는 사람들을 플랫폼 운영 및 소유에 참여 유도
5.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술의 작동 원리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요 정책을 시민과 함께 결정
6. 코딩 등의 교육을 넘어 시민 누구나 기술을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교육

모두를 위한 기술을 기대한다면 이 6가지 원칙에 따른, 모두에 의한, 모두의(가 함께 소유하는) 기술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이때 가능한 선택지는 다양하게 열려있는데요. 선택지를 살펴보려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다음은 유명한 SF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솔라리아’라는 행성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대화할 필요가 생기면 화상으로만 이야기를 나눕니다. 고도로 발달한 로봇이 필요한 모든 물품을 생산하고, 시설을 관리하기에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집단을 이루면 갈등이 생겨 내 의지를 꺾거나 상대의 의지를 꺾어야 하는 일이 생기니, 자원과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거리를 두고 행성 전체의 인구도 섬세하게 관리합니다.” 

코로나19로 물리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서로에게 혐오와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원격 근무를 실험하며 안락함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가는 지금, 우리 사회는 ‘솔라리아’를 닮아가게 될까요? 그러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세계에서 ‘솔라리아’는 인류가 우주로 나가면서 개척한 행성 중 마지막 50번째였고, 나머지 행성들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갔습니다. 우리의 미래에도 가능한 선택지가 다양하게 열려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잠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신과 후손들이 살아가게 될 미래를 선택하는 과학과 기술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나요?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장치와 제도, 토론과 논쟁이 충분히 가능한 환경인가요?

앞서 얘기했던 시빅해커들의 모습을 떠올려봅시다.

마스크 재고 앱 개발에 참여한 시민은 중학생부터 대학생, 스타트업 개발자 등 다양했습니다. 다양한 오픈소스와 간편한 기술 인프라에 더해 공공 데이터가 적극적으로 제공되어 누구나 마스크 재고 앱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빅해커들은 자신들의 기술로 사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고, 정부의 적극적인 데이터 공개와 누구나 참여 가능한 기반 제공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시민의 디지털 역량이 커지고, 공공의 디지털 자원이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할 때 사회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달라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커진 것이죠.

<노동 없는 미래>를 쓴 팀 던럽은 기술 발전으로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제시하면서도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만일 소수가 원하는 것들보다는 다수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응하는 정부를 재창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새로운 로봇 지배자들을 환영하고,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의 삶을 살 기회가 싹 사라져 버린 세상, 그리고 그들과 우리로 갈라져 대립해야 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불행한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기술을 둘러싼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공공과 사회가 공유하는 기술을 늘려나가야 합니다. 다수를 위한 디지털 기술 기반의 사회 혁신이 작동하도록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기술을 만들고 그에 필요한 환경 구축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변화한 시민과 기술 혁신에 기반한 거버넌스 체계 혁신

촛불시위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열망과 함께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은 ‘시민들의 활동 방식’입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과 형식으로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놀이와 활동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집회에 참여한 나’를 강조하며 자아정체성 드러내기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촛불시위에서 관찰된 시민들의 활동 방식은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과 디지털 플랫폼의 확대가 본격화되고 시대와 시민이 변화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두 한국사회가 수용해야 할 시민 참여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시민 참여의 형식은 청와대의 국민청원으로만 수렴된 듯합니다. 다수의 국민은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고 뉴스를 소비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기자나 전문가의 게이트 키핑이나 이슈 메이킹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이슈를 만들 수 있는 창구로 국민청원을 택합니다. 이를 통해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역대 정권에 비해 분명 소통의 질과 양이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효능감 역시 높아졌습니다. 다만 현 정부에서의 시민 참여는 여기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소통’이라는 키워드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시민들의 열망은 더 큽니다. 10년 전의 참여 정부, 아고라와 비슷한 국민청원에서 그치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에 대한 궁금증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촛불시위를 통해 발현된 더 나은 민주주의 체계를 향한 열망과 기대감 덕분에 조직 내 민주주의, 젠더 갈등, 개별 사건에 대한 이슈 메이킹 활동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을 둘러싼 논의는 제한된 참여 형식과 경로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는 데에 그쳤습니다. 이는 조정이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정책으로 입법화하지 못해 사회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비판과 함께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혁신적 포용국가’는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추구하며, 배제와 독식이 아니라 공존과 상생의 사회를 도모하고, 미래를 향해 혁신하는 사회이며, 강자만을 위한 대한민국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대한민국을 의미한다”

문재인 정부의 비전입니다. 시민들의 높아진 열망을 뒷받침하고,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정부와 시민사회가 참여의 형식과 경로를 늘려 공존과 상생의 기반으로서의 소통과 협력의 기반을 확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시민 참여의 변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를 만들 때 고려해야 할 방향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시민 참여의 포괄적 정의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시민 혹은 시민 단체 활동가와는 다른, 사회 문제나 활동에 무관심한 시민을 의미하는 ‘일반 시민’이란 이상한 용어가 있습니다. 기획, 실행, 운동 전체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일부에만 관여하는 시민입니다. 일반 시민은 그동안 사회 변화의 주체로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여론 조사를 통해서도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아 사회 변화의 주체로 주목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민’으로 다시 불려야 합니다. 

기술을 가진 개발자나 디자이너는 시빅해커(Civic Hacker)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정부가 투명하게 공개한 데이터를 활용해 서비스를 직접 만들어 제공합니다. 난임의 고통을 겪는 시민들은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이것이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발견하고 정부가 저출생 시대의 대책으로서 난임 당사자들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는 활동을 하는 이들은 환경부에 강력한 단속을 요구합니다. 또한 대형 커피숍 프랜차이즈에 일회용품 사용을 줄일 것을 촉구하지요. 보편적, 실질적인 현상을 파악하려면 이들의 활동을 포괄해서 시민 참여를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활동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2. 종합적이고 협력적인 시민 참여 모델

시민 참여 혹은 시민 주도의 분권 및 자치 모델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작은 조직과 큰 조직의 소통과 협력 방식이 다르고, 조직과 조직, 개인과 조직 간의 소통 방식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법을 만드는 과정에 시민을 참여시키는 경우와 시행 중인 정책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거나 갈등 상황에 놓인 이해당사자를 조정하는 경우도 서로 다릅니다. 적합한 구성 방식을 갖추고 나면 각 단위 간의 조정과 협력 역시 필요합니다. 다양한 민주주의 모델을 개발하고 해당 단위들 사이에도 조정과 협력이 일어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작고 유연한 커뮤니티,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조직, 외부 이해관계자들과의 협력, 투명한 정보 공개와 갈등 조정 기능을 포함합니다.

다양한 단위에 적합한 소통과 협력 모델, 이들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예를 들어 서울시는 ‘민주주의 서울’을 통해 시민이 내는 제안, 서울시가 만든 정책을 공론화하는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시민 개인의 제안을 한 명의 공무원이 답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소수의 시민이 제안하고 더 많은 시민이 함께하는 공론화 단계를 거쳐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모델을 만들 계획입니다. 시 정부의 역할을 고려한 설계입니다.

민주주의 서울은 제안을 공론화하는 과정과 이를 운영하는 체계를 수립하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3. 협력적인 소통에 필요한 기술 기반과 정책

눈부시게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 속에서도 유독 제자리걸음을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미디어와 댓글, 토론 등의 협력적인 소통에 필요한 기술 분야입니다. 투자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미디어 서비스는 종이를 디지털화한 데 머물러 있습니다. 토론은 댓글을 남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한된 도구는 제한된 소통 방식과 여러 부작용을 낳습니다. 

현재 기관들이 주도하는 다양한 시민 참여 플랫폼은 기능 및 운영 노하우 부족이라는 문제 이전에, 기술적인 인프라가 충분치 않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온라인에서 안전하게 의견을 낼 수 있나요? 온라인에 표출된 의견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신뢰는 어떤 조건을 내포할까요? 다수가 신뢰하는 데이터가 있나요? 다수가 신뢰하는 대중매체는 있을까요? 의견을 주고받고, 갈등과 조정을 거쳐 합의에 이르는 프로세스는 존재하나요? 대표성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해외 사업자가 운영하는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나 정책은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고, 지금도 충분히 준비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페이스북 상에서 불법적으로 정보를 공개한 페이지 운영자와의 대화입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정부는 부처별로 제각각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공 데이터 확대, 미디어 산업 육성 및 가짜 뉴스 대책 마련, 젠더 폭력 방지 대책, 개인정보보호 대책, 블록체인 기반 투표 시스템 개발 등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흐름이지만, 이를 넘어서 통합적인 논의의 장이 필요합니다. 공존과 상생을 달성하기 위한 포용국가의 인프라로서의 비전을 세우고 소통과 협력에 필요한 기술 개발과 정책 수립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글과 댓글, 좋아요가 시민 참여를 위해 우리가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의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4. 점진적인 진행 및 혁신적인 수단 

물론 시민 참여의 의미를 확대하고, 사회 곳곳에 필요한 소통과 협력 모델을 개발하며, 이에 필요한 기반 기술과 정책을 마련하는 과정이 단번에 이뤄질 수는 없습니다. 시민 참여 플랫폼 개발 및 운영, 활동하는 시민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만이 과정의 전부인 것도 아닙니다. 

직접민주주의 요소와 기존 대의제 및 관료 조직과의 융합,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정의하는 사회적 합의, 대표성의 정의에 대한 정책 결정 등 시민 참여를 확대하고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선 거쳐야 하는 단계가 많습니다. 이들을 실험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실험을 수행하는 동안 여러 가지 안전장치가 있어야만 합니다. 가능하면 갈등과 사회적인 임팩트가 덜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심각한 갈등이 있거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와 빠띠는 ‘민주주의 서울’을 시작할 때 결정의 역할보다 시민과의 논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한편 지금은 서울 시민과 함께 중요한 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정책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민토론의제선정단과 같은 단위를 만들어서 시민들의 단순 제안이 정책화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기획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제를 논의할 때에도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들이는 노력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데모스X로 플랫폼 운영 가이드와 소스를 공개해서 외부 전문가들의 피드백을 받기도 하고 시행착오와 노하우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서울과 같은 기관 주도 공론장 외에도, 빠띠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입법 프로젝트나 공론장 운영 프로젝트, 이슈 커뮤니티 구성 등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하우를 민주주의 툴킷으로 정리해서 오픈소스로 공개했습니다. 

서울시와 빠띠가 오픈소스로 공개한 민주주의 서울 플랫폼 소스와 운영 가이드 데모스X입니다, 이미지 출처: 데모스X 캡처 화면
빠띠의 시민입법, 시민토론 등의 민주주의 툴킷입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홈페이지 캡처 화면

산업을 육성할 때 활용하는 혁신적인 수단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 캐피털인 와이콤비네이터는 2017년에 민주주의, 언론, 일자리 문제를 다루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유럽위원회는 2012년부터 The CAPS initiative (Collective Awareness Platforms for Sustainability and Social Innovation)를 운영하며 지속가능성과 사회혁신을 위한 달라진 시민 참여 기반의 솔루션을 만들기 위한 연구 작업, 펀딩, 플랫폼 개발을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정부의 시민 참여 플랫폼 연구를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야 합니다. 시민 참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회적 기업이나 플랫폼 협동조합이 늘어나면 더더욱 바람직하겠고요. 

CAPS의 활동 영역입니다, 이미지 출처: CAPS

결론

디지털 기술이 변화하는 속도만큼, 시민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 속도가 늦춰질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뒤쫓을 게 아니라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고 그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어지도록 함께 기여해야겠지요.

디지털에 기반한 정보 기술은 정보를 축적 및 확산할 수 있고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를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을 수립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의 경우,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이뤄낸 성과를 돌이켜보면 포용적이고 협력적인 거버넌스 체계 수립을 앞서 실현할 수 있는 사회 경험과 기술 기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압축 성장을 거쳐 서로 다른 경험을 한 다양한 세대가 동시대에 사는 복잡한 사회이기도 합니다. 분단국가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갈등을 조정하고 상생과 협력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혁신적인 민주주의와 거버넌스 체계 수립이 과제이면서도 기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다음 5개의 거버넌스 체계 요소가 잘 기능하는 사회를 바라봅니다.

1) 사회가 공통으로 신뢰하는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 정보공개
2) 누구나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이슈를 가지고 각자의 여건만큼 활동하며, – 커뮤니티
3)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이슈에 모두가 함께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 캠페인
4) 참여한 시민들이 서로 신뢰하는 방식을 활용해 공론을 만들고, – 매스 미디어, 공론장, 소통과 신뢰 기술
5) 공론이 기관의 정책 수립, 법 개정, 예산 조정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 – 기관 주도 공론장

이제는 이런 사회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글 | 빠띠 설립자, 슬로워크 소셜테크랩 리더 시스
이미지 | 슬로워크 책임 디자이너 길우
편집 | 슬로워크 책임 테크니컬 라이터 메이

사업을 해 보세요: 최종 책임을 진다는게 무엇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가 없다’는 이유로, ‘혼자서도 쉽게 시작할 수 있고 여러가지 단순해진다’는 이유로 회사라는 형태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업을 한 후에 알게 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최종 책임을 진다는게 무엇인지”입니다.

초기 단계의 회사에는 어려운 일이 늘 생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한 여력이나 적임자가 준비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경험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다행히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동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최종 책임은 창업자에게 있고, 책임의 무게는 창업자가 더 크게 가질 수 밖에 없고 그래야만 합니다. 또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가 닥쳐올 땐 동료들과 각자 집중해야 하는 문제를 나눈 후에, 대표가 남은 문제 모두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성을 지키기 위해 남문을 지킬 사람과 동문을 지킬 사람을 지정하고, 남은 북문과 서문은 어떻게든 혼자서 막아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결과 회사가 망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빠르게 파악하고,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거나 자신의 리더에게 넘기는 사람입니다. 좋은 회사는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구분해서 구성원이 적절한 난이도에서 성장하며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관리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초창기의 창업자나 대표에겐 그런 환경은 없습니다. 구성원이 할 수 없는 일을 넘기고 넘기다 보면 넘길 수 없는 곳까지 갑니다. 그건 모두 대표가 해결해야만 합니다. 또한 구성원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을 무리해서 맡기면 결국 그 일은 해결이 안 된 채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남문을 맡겨 놓은 동료가 어떤 이유로든 실패하거나 버거우면, 대표는 북문과 서문을 막다가 남문까지도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정말로 많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막는다는게 무엇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조직이 돌아가기 위해서 구성원으로 일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역할들이 보입니다. 넘길 수 없는 일들을 손에 쥐고, 해결하지 않으면 조직이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되든 안 되든, 할 수 있든 없든 안간힘을 써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도 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조직이 성장하고 안정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탓해 봐야 소용없고, 오히려 탓해 보았자 더 힘들어지기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내 손에까지 들어온 폭탄은 이 세상 어디에도 넘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폭탄을 안고 함께 죽거나, 폭탄을 해체하거나, 폭탄이 터져도 피해가 최소화하도록 내 선에서 막아야 합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왜 나만 이래야 하지?”, “왜 몇몇만 이래야 하지?”란 생각을 가지게 되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가치와 원칙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져야 하는 책임은 자신이 받아들여야 함을 배웠습니다. 불평을 하고, 책임을 지기 싫다면 사업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책임을 받아들이면 다른 구성원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해결해 주지 않는 문제를 결국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개인들도 비슷합니다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과 책임들을 내 손에 쥐고 전전긍긍하면서 헤쳐나가는 경험은 사업을 통해서 더 크게 겪어 보게 됩니다. 삶을 더 즐기고 싶은 분들은 꼭 사업을 해 보세요. 강제로 성장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스릴 넘치게 만끽하게 됩니다.

슬로워크를 시작한 이유들: 왜 사회를 혁신하는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일자리 모델을 선택했을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서의 디자인, 우리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결정하고 일하는데 기술이 가지는 중요함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깊게 공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는 비영리단체, 사회적기업, 정부와 여러 기관들이 가진 디자인과 기술 역량은 조직 내에 충분히 내재화 되지 못했다.

사회혁신영역(소셜섹터)의 기술 역량 강화 문제는 중요한 과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디자인과 기술의 전문가들이 안정된 일자리라는 터전 위에서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가 갖추어져야 한다. 슬로워크(혹은 UFOfactory)를 시작할때 내가 내렸던 주요한 결정은 바로 여기서 시작했다.

당시에는 어떤 단체가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정기 뉴스레터를 보낼때 대부분 세가지 방식 중 하나를 택했다. 젊은 상근자가 어떻게든 만든다. 주변 개발자, 디자이너 친구 또는 자원봉사자에게 부탁한다. 금전적으로 조금 여유로운 단체는 개발이나 디자인을 전담하는 인력을 한명 채용한다.

나 역시도 ‘홈페이지가 갑자기 안 되는데 도와달라’는 요청부터 시작해서 ‘프로젝트를 같이 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으로 이어지다가, ‘단체에 들어와서 일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원봉사자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내부의 전담인력은 고립된 섬처럼 지내다 크게 지쳐 조직을 떠난다. 가치 중심의 활동이 중심이 되는 조직에서 기술 전문성을 갖춘 인력들은 제대로 대우를 받기도 어려운데다 스스로의 전문성을 키울 기회도 갖지 못한다. 게다가 기술 전문성이 없는 활동가가 어쩔 수 없이 뉴스레터, 웹자보, 홈페이지를 다루다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일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일을 두배로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지금은 덜하지만 예전엔 컴퓨터를 고치거나 고장난 인터넷 망을 해결해야 하는 일도 했다. 요즘엔 영상까지도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는 기술(디자인,테크놀러지,글쓰기 등등) 전문가가 따로 모여서 전문성을 키우고, 이들이 활동가 조직과 만나 함께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섹터 내에서 외롭게 지내왔던 전문가들이 활동과 기술을 엮어내는 전문성을 더 키우는 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전문가로서 더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사회 문제나 아젠다에 큰 관심이 없었던 개발자와 디자이너들도 소셜 섹터를 접하면서 각자가 가진 전문성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해 가는 환경을 만들어 내길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는 급여 수준을 적어도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반 기업들의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과제도 함께 따라왔다.

슬로워크는 지금까지 매년 1,200개 이상의 기관들과 수백개의 브랜드, 캠페인, 웹사이트(홈페이지 플랫폼 포함)을 만들어 왔다. 소셜 섹터 안에 기술과 디자인 전문성을 갖춘 조직을 만들어야 섹터의 역량도 한 뼘 더 성장하고, 결과물의 퀄리티도 올라가며, 일을 하려는 전문가들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이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더 많은 전문가들이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 사회를 혁신하는 임팩트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 소셜 섹터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슬로워크 같은 조직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민주주의 플랫폼의 조건과 민주주의 서울의 시작

2017년 2월 9일.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서울시청 근처로 두 공무원을 찾아갔습니다. 설 직후라 조용했던 서울시청 근처, 저는 그날 처음 본 분들에게 “담당 공무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요. 여러 필수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서 무리하지 않으시면 좋겠네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올해 말까지 시범사업을 끌어온 ‘민주주의 서울’의 첫 미팅 자리였습니다.

대통령 탄핵 정국이었던 그 당시 빠띠가 해 왔던 사업이나 빠띠가 만났던 사람들은 대체로 “시민이 자발적으로 자기 조직화를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입장과 “누군가 시민을 불러모아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미묘하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빠띠는 ‘시민의 자기 조직화’에 집중하며 우주당을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빠띠가 직접 하는 사업과는 별개로 우리가 만나는 분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생각이 실현되는데 필요한 게 무언지 고민해 주고 함께 답을 찾아보는 일도 자주 하고 있었죠. 그러나 탄핵 정국에서 기관의 민주주의 플랫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하는 팀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전에도 몇 년간 서울시의 다른 담당자들을 서너 차례 만나긴 했었습니다. 처음엔 ‘천만상상 오아시스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였고, 이후엔 ‘디사이드 마드리드 같은 것을 서울시에 도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였어요. 아래에 나눌 이야기를 똑같이 해드렸지만, 이야기한 내용 중 부분부분만이 떠돌다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운영팀을 구성하고 운영팀이 “애자일 방식이나 MVP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애자일”이 한동안 서울시 내에 회자되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설 직후 미팅에서 만났던 분들은 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된 분들로, 실제로 그 업무를 직접 다루고 있는 분들이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상명하달로 주어진 업무여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맡게 될 업무를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시로 옮겨온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아직 발령을 기다리는 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한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늘 하던 답, 지난 몇 년간 제가 서울시 다른 담당자들에게 말씀드렸던 이야기를 우선 그대로 해드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아직 온라인상에서든 오프라인상에서든 시민들의 단순 제안이나 청원을 넘어, 참여와 토론, 권한을 어떻게 위임할지 연구가 많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 답을 함께 찾아가는 팀을 만들고, 그 팀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팀의 구성원은 외부 전문가와 내부 공무원이 섞여 있는 게 좋고, 외부 전문가는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나오는 디지털 플랫폼은 반드시 최대한 간단해야 합니다. 고민과 노력이 깊을수록 플랫폼이 간단해지는 것이지, 간단한 걸 따라 만든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2. 민주주의 플랫폼이든 시민참여플랫폼이든 이 플랫폼을 통해서 어떤 효용이 있을지를 시민들이 믿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플랫폼의 최고 책임자가 정무적인 역량과 동시에 시 내부 체계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합니다. 그 권한은 상징적이어도 괜찮지만, 필요할 때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통은 시장 주도로 하거나, 부시장이 주도하거나, 혹은 시장이 외부 전문가에게 1번의 조직을 만들며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3. 어떤 플랫폼이나 정책이든 초반에 열광하며 믿고 참여하는 시민이 필요합니다. 물론 새로운 일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만드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큰 기업에서도 막대한 비용을 들이지만 이 일에 애를 먹는 게 대부분입니다. 초기에 선출직 리더를 지지하는 기반이 탄탄하다면 이 기반을 활용해서 시민과의 소통, 협력을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입장이 강화되더라도 그 부작용을 관리하면서 나가는 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니 현재 시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또 얼마나 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수 조건입니다.

요약하면 1) 전문성을 가지고 답을 찾아갈 권한을 위임받은 운영팀, 2) 팀을 이끌거나 혹은 단단하게 지원해 주는 권한을 가진 책임자, 그리고 3) 초기에 시정을 지지해주는 시민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서 사실 세 번째만 있어도 초기 흥행은 성공합니다만,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없으면 2년 안에 실질적인 변화가 없다며 지지자들이 실망하며 돌아섭니다. 그 틈을 타서 정치적 입장이 다른 진영에서 정책이 소용이 없다거나, 무책임하다거나, 부작용이 심하다는 공격이 들어오게 된다고도 말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플랫폼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게 여러 가지 더 있지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성공합니다”라는 정답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기관이라면, 위의 세 가지가 갖추어져 있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해 보라고 권합니다. 한국에서는 공무원과 전문가를 섞은 팀을 만드는 방식도 경직되어 있어서, 지금은 1번의 운영팀을 내부의 의지를 가진 담당 공무원들과 외부의 전문가팀, 두 개로 나누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탄핵 정국, 그리고 박 시장님의 임기가 1년 남짓 남은 상태에서 서울시에 갓 배정받은 두 공무원, 거의 다 망가진 상태였던 천만상상 오아시스, 여기에 갑자기 높아진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기대감이 무색하게 실험도 고민도 해 본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거의 없는 상황까지.

여러 가지 넘어야 할 조건을 논의하고 난 후 “너무 고생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의 권한 밖에서 준비되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요”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끝이 났다면 지금 민주주의 서울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 후 얼마 뒤에 저는 다시 연락을 받게 되고, 그로부터 다시 반년 뒤 ‘민주주의 서울’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함께 만들게 됩니다.

슬로워크와 함께 일한 조직이 1100곳

2013년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UFOfactory를 창업할때는 소원풀이를 한다는 심정이 컸습니다. 안정적인 회사를 다니면서 남은 시간을 그때 막 관심을 받기 시작하던 공유기업 중 하나의 서비스를 만들어주곤 했는데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사회를 바꾸려는 곳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 기반을 제공하는 일을 제가 한번은 제대로 해 봐야 아쉬움이 남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Daum에 입사하면서 잡았던 목표이기도 했고, 2010년에 Daum을 퇴사하면서 하게 되리라 기대했던 일을 유보하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때 그런 계획을 이야기했을때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고생할게 뻔하고(그건 맞았어요), 생존하기는 불가능하다(아직 살아있네요!)며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걱정어린 조언들뿐이었어요.

그렇지만 사회를 바꾸려는 이들을 회사를 다니며 남는 시간을 내어 자원봉사 형태로 돕는 것만으로는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는 힘들다는 생각은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가 지속가능하려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고 저는 믿었어요. 저부터가 살아온 내내 월급이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더불어서 어설프게 자원봉사를 하느니, 한번은 기업을 만들어 도전하고 주변 사람들의 예상대로 빨리 망하면 깔끔하게 포기하자 생각을 했습니다.

망할 가능성을 높게 두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구성원들에게 실례이기 때문에, 저는 회사를 운영하던 초기에 구성원들에게 늘 “우린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기술을 익히는데 집중하시면 좋겠다고 이야길 했고, 어디보다도 힘들 수 있는 이 영역의 일을 해내는게 다른 영역에서는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금방이라도 그만 두고 싶다면, 회사는 내일이라도 문을 닫을 수 있도록 구성원의 퇴직금을 착실하게 적립하였으며, 회사에 빚을 만들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어요. 지금 보니 무차입 경영입니다만, 비용은 매우 낮고 기술 이해도도 낮은 파트너들과 고민을 나누며 서비스까지 기획한다는 사업이 제가 봐도 망하기 좋은 아이템이었던 거죠. 한편으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란걸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어요.

그랬던 UFOfactory가 3년을 버티고 예비사회적기업이 되었다가, 빠띠라는 ‘하면 망한다’는 이야길 들은 서비스를 만들고(그래도 빠띠는 다행히 스폰서가 있었어요!), 이후에 슬로워크와 합병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합병 후에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열린 지난주 워크숍 때 확인을 해 보니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이 63명이고 직간접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다 합치면 100여명 가까이가 됩니다. 사업부는 7개로 늘어났고, 각각의 사업부가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성장할 준비도 하고 있구요. 매출 역시 두 회사를 단순 합친 금액을 넘어서고 있구요.

NPO파트너페어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만났던 조직들, 우리가 만들었던 작업들, 우리가 만든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대략 이렇게 나왔습니다.

Slowalk+UFOfactory = Slowalk.
We are Creators for Change

Since 2005,
슬로워크와 손잡고 변화를 만든 조직 1100곳
디지털 시대에 꼭 필요한 PC/모바일앱 사용자 3천만 명
조직의 가치와 철학을 반영한 브랜드 700개
스티비를 통한 더 효과적인 이메일 3억 통
빠띠와 함께 더 민주적인 세상을 만든 51만 명

대부분 비영리조직이거나 사회적기업, 혹은 기관인 우리의 파트너가 1100곳이라니 저 역시도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가 만든 서비스를 한번이라도 써 본 사람들의 수 역시도 적은 수가 아닙니다. 아마도 제가 회사를 다니며 시간을 쪼개서 사회적기업이나 공유기업을 도왔다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수치입니다.

그리고 처음 생각과 달리 이 섹터는 이 섹터 나름의 매력과 강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도 어느 틈에 생각보다는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구요. 영리를 대상으로 하는 일과 비영리를 대상으로 하는 일의 균형이 맞아 돌아가면 운영에서도 안정감이 생기고, 무엇보다도 영리를 추구한다는 행위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시대로 바뀌면서 저희의 미션이 더 주목을 받게 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왔나 싶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가벼운 마음은 이제 묵직한 책임감으로 변한지 꽤 되었구요. 그러나 한편으론 점점 더 제 역할이 줄고, 동료들과 동맹들이 멋지게 내는 성과들을 통해 제가 함께 살아간다는 안전감도 커져 갑니다.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와 그리고 우리와 어깨를 걸고 등을 대고 함께 사회에 도전하는 동료들과 동맹들이 앞으로 벌일 일들이 기대되고, 우리가 함께 한 일들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