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이용’을 넘어 ‘후생’으로, 그리고 ‘정덕’의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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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기술이 약속했던 개방과 연결이 현실에서는 불신과 고립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축적과 자동화는 불평등과 추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술 그 자체에는 죄가 없겠지만, 방향을 잃은 기술은 사회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렇기에 기술의 방향키를 잡은 사람들이 가지는 책임이 큽니다. 과연 우리는 기술의 방향키를 어디로 맞추어야 할까요?
현대 사회는 기술을 ‘혁신’이나 ‘초격차’와 같은 속도와 효율의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200년 전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던진 오래된 화두인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정덕(正德)’을 다시 꺼내 들고 싶습니다.
이용, 후생, 정덕 (利用, 厚生, 正德)
“기구를 편리하게 씀으로써(이용) 삶을 넉넉하게 하고(후생), 삶이 넉넉해진 뒤에야 비로소 도덕을 바르게 세운다(정덕).”
이 오래된 지혜는 오늘날 우리가 기술을 통해 도달해야 할 목표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새로운 기술을 잘 쓰는 것(이용)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기술이 우리의 삶을 지켜내고(후생), 나아가 우리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정덕)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바로 ‘평화로운 개인(후생)‘과 그들이 협력하며 만드는 ‘평화로운 세상(정덕)’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기술을 ‘피스테크(Peace Tech)’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 평화로운 개인: 후생(厚生), 삶의 온전한 순환
먼저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봅시다.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떠나는 개인에게 평화로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개인이 누리는 평화가 다음 4단계의 순환을 통해 완성된다고 봅니다.
- ① 돌봄 (Care):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게 태어납니다. 평화의 기초는 생존과 안전입니다. 기술은 약자를 착취하는 도구가 아니라, 모두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 ② 독립 (Independence): 충분한 돌봄은 자립을 낳습니다. 진정한 후생은 배부른 사육이 아니라 자유로운 독립입니다. 기술이나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지향에 따라 자유롭게 삶을 이끄는 ‘주체적인 삶’입니다.
- ③ 협력 (Cooperation): 독립한 개인은 고립되지 않고 손을 잡습니다. 억지로 묶인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로 타인과 연결되어 사회와 공동체에 자신의 주체성으로 기여합니다.
- ④ 돌봄의 환원 (Care Given): 순환의 완성은 다시 돌봄입니다. 독립적이고 협력적인 삶을 살다가, 자신이 가진 것을 사회에 환원하며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돌볼 때 개인의 삶은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돌봄 독립 협력 돌봄]
삶의 결핍을 채우고 주체로 서게 하는 실질적인 삶의 질, 즉 후생(厚生)의 순환이 막힘없이 흐를 때 우리는 비로소 “나는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서로를 돌보고, 독립을 지지하며, 협력하는 단단한 공동체가 됩니다.
2. 평화로운 세상: 정덕(正德), 회복탄력성 높은 사회
개인의 삶이 이토록 온전히 순환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풍경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박지원이 말한 ‘정덕(바르게 사회를 세움)’의 단계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갈등이 박제된 조용한 박물관이 아닙니다. 시끄럽고 복잡하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높은 사회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다음 4가지로 그립니다.
- ① 포용과 연대 (Inclusion & Solidarity):
배제되는 사람 없이 연결되는 세상입니다. 이때 기술은 차별의 도구가 아니라, 가장 소외된 목소리까지 담아내는 그릇이자 서로 연대하는 매개체가 되어 ‘누구도 홀로 남겨두지 않도록’ 사용하는 사회입니다. - ② 협력과 신뢰 (Cooperation & Trust):
갈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조정하며 사회적 자본이 쌓이는 세상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오가더라도 파국이 아닌 합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그 신뢰가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사회입니다. 실질적인 협력의 경험을 반복하며 신뢰의 바탕이 됩니다. - ③ 공유와 해방 (Sharing & Liberation):
소수의 독점이 아닌 모두의 자산이 충분히 축적된 세상입니다. 데이터와 플랫폼, 알고리즘을 사유화하지 않고 커먼즈(Commons)로 모두가 공유함으로써, 구성원 모두가 다양한 구속으로부터 함께 해방되는 사회입니다. - ④ 지속가능한 풍요 (Sustainable Abundance):
파괴적 성장이 아닌, 적정 기술을 통해 누리는 충분한 풍요입니다. 미래 세대와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에 충분한 자원을 가진 사회입니다.
3. 평화로운 삶과 세상의 연결
평화는 [편리한 도구(이용) 개인의 온전한 삶(후생) 풍요롭고 정의로운 사회(정덕)]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입니다.
개인이 돌봄 받고 독립하여 협력하고 다시 베푸는 동안, 세상은 포용하고 신뢰하며 공유하고 풍요로워집니다. 이 거대한 두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상태, 평화로운 삶과 평화로운 세상이 이어질 때의 ‘평화(Peace)’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기술 생태계는 어떤가요? 우리에게 놀라운 ‘이용(편리함)’을 주었지만, 그것이 진정한 ‘평화로운 삶(후생)’과 ’평화로운 세상(정덕)’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개인들의 삶은 고립되며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개인이 평화로운 삶을 잃어버리니 사회의 ‘평화’도 요원합니다. 신뢰 대신 혐오가, 공유 대신 독점이 판을 칩니다. 불안한 삶을 사는 개인들이 사회를 불신하며 각자도생에 몰입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무관심하거나 혐오하는 고립된 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4. 다시, 이용후생과 정덕의 기술을 위하여
우리는 단순히 ‘더 빠르고 편리한 이용’만을 좇는 기술을 넘어, ‘개인의 평화로운 삶을 돕고,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세우는 기술’을 만들어야 합니다.
- 나를 소모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지키고 독립시켜 개인의 ‘평화로운 삶’을 만드는 기술.
- 우리를 갈라놓는 기술이 아니라, 신뢰와 공유로 연결해 우리가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술.
박지원이 수레와 벽돌이라는 구체적인 도구를 통해 이용후생을 실현하려 했듯, 우리에게도 평화를 위한 사회의 인프라로서의 구체적인 ‘기술 스택(Tech Stack)’이 필요합니다.
기반부터 프로세스, 그리고 그 성격까지 완전히 다르게 설계된 3가지 기술 층위가 결합될 때, 21세기의 이용후생과 정덕은 비로소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 설계도를 ‘평화를 위한 시빅 테크 스택(Peace Tech Stack)’이라고 불러 봅시다. 그리고 ”열린 기술(Open Tech) + 민주주의 기술(Democracy Tech) + 공공재 기술(Commons Tech)”이라는 방정식으로 구체적인 기술 스택을 정의해 봅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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