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알레르기와 민주주의 바이러스

한국과 일본을 거의 매주 오가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인천공항에 내려서 서울로 들어오자마자 내게 비염 증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비염은 아주 어릴 때부터 늘 나와 함께 했던 증상이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만, 한국에서 콧물을 흘리며 지내다가 일본으로 돌아오면 하루만에 그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공기가 좀 나빠서 그런가 보다, 한국에선 무리하며 일하니까 몸이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어느날 누군가가 “알레르기”일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지금까지 한국에서만 지내와서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국의 어떤 공기 성분에 대한 “알레르기”가 내게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제가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레르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그런 알레르기요. ( 물론 현재 서울의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서일지도 모릅니다 )

환경이 바뀌어서야 추측이라도 해 보았을 이런 “알레르기”처럼 기존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또 다른 “알레르기”를 최근에 하나 더 발견한게 있습니다. 바로 “권위주의”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인데요. 그냥 ‘모두가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팀이 중요하고 더 효율이 높다’의 원칙 정도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 자신도 느끼기 전에 권위적인 상황을 극도로 경계하며 만약 그런 유사한 상황이란 판단이 들면 어떻게든 해결하거나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 교회를 다닐 때에도 그랬습니다. 제사는 성도들이 신에게 올리는 것이며, 메시지는 신으로부터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게 원칙인 것 같은데, 제사장을 자칭하는 목사나 전도사, 리더들이 성도들의 고통을 신에게 더 잘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않거나, 성도들에게 리더로서의 자신들의 주장과 인격을 섬기게 하려고 할 때 지켜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분들이 설명하는 예수가 희생한 까닭과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죠. 저로서는 그 분들의 역할이 전달자이자 매개자, 촉진자라고 생각했기에 그 상황이 불편했고, 한편으로는 지나치다시피 예민해 하는 나 자신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후 교회를 떠나 몸 담았던 조직들, 운영하는 회사에서도 비슷한 문제 상황은 반복되었습니다. 하려던 일은 “미디어, 커뮤니티, 사회 혁신” 등이었는데, 내부를 들여다 보면 권위가 한두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구성원들이 조직을 신뢰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조직을 만드는데 나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Daum에서 기획자로 역할을 옮긴 이유는 미디어와 커뮤니티와 관련된 업무를 모두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기획자가 되지 않으면 팀 내의 기획자와 개발자, 디자이너 간의 역할 균형을 바로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는 대표에게 쏠리는 권한이나 책임을 구성원들이 버거워 하더라도 나누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습니다. 회사가 개발자 집단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를 찾고 맺으려고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지금은 무조건 민주주의가 옳거나 늘 효과적이진 않다고 인정합니다만, 돌이켜 보면 저는 제가 처하는 환경을 민주적으로 협력이 가능한 환경으로 바꾸는 일부터 늘 해 왔습니다. 때로는 나의 과잉 반응이 좋은 리더도 나쁘게 비판하고 불편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민주적 협력을 위한 시스템과 문화”가 당연한 것이니 무의식적으로 혹은 강박적으로 내가 있는 곳 어디나 나와 일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적용하고 평가하려 했을 겁니다. 마치 화성을 지구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테라포밍 하듯이요. 일이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가장 먼저 하곤 했던 작업으로 “민주적 협력 환경”을 만들려 했지만, 실제로는 이 조건이 물고기에게 물이 필요한 것처럼 저에겐 너무나도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던 겁니다.

지금 하고 있는 빠띠우주당도 그 흐름과 이어집니다. 저는 빠띠를 통해 더 많은 조직들이 민주적으로 협업하는 걸 경험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우주당을 통해서는 시민들과 정치인들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려 하고, 사회 전체가 서로 협력하는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만 의미가 있는 변화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도 모르게 현실 정치 이전에 민주주의 시스템과 문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었나 봅니다.

분명히 저는 어떤 일이든 함께 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 민주적으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협력 관계를 우선 만드는데 집중하거나, 그런 협력 관계가 가능한지를 먼저 살피는게 분명합니다. 사회와 개인, 조직과 개인도 그런 관계를 더 맺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옳든 그르든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일을 하게 될 겁니다.일의 성과와 상관없이 “민주주의”와 “민주적 협력 문화와 관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게 나의 정체성 중의 하나입니다.

왜 그런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습니다만, 아무튼 지금은 “민주적 협력 관계에 대한 강박”이란 정체성을 인정하고 일을 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게 나 스스로의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주문 중 하나입니다.

사업을 해 보세요: 사업을 시작하는 이를 위한 팁 – 통장과 카드 관리 팁을 알려드립니다

UFOfactory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사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배운 팁을 하나씩 함께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큰 투자를 받고 시작하거나 뒷받침을 해주는 모회사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 나 홀로 스타트업을 시작한 외로운 영혼들에게 유용할 만한 팁들일텐데요. 그 첫번째로 통장 이야기입니다. 이 팁은 최현모님으로부터 UFOfactory 설립 직전에 배운 팁이에요.

법인이든 개인이든 사업자 등록증을 세무서로부터 받으면 이제 본격적인 사업자가 됩니다. 그 사업자등록증을 은행에 가져가서 통장을 개설하게 되죠. 우선 은행은 사업장과 가까운 곳이면 좋습니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1-2년은 대표가 직접 은행에 갈 일이 자주 생길 꺼에요. 개인 자격으로 주로 거래했던 은행에 통장을 개설하면 제 거래 실적이나 신용도가 새로 만드는 회사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았어요. 해외 서버를 이용한다거나 할때 필요한 신용카드 한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통장을 만들때 팁은 하나는 주로 사용할 입출금 통장을 만들고, 여분으로 하나를 더 만드는 겁니다. 매출이 발생할때마다 들어오는 부가세 10%를 무조건 넘기는 용도의 통장인데요. 처음 사업을 하다 보면 부가세라는 개념이 낯설텐데요. 부가세는 그냥 무조건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맞습니다. 그러니 매출이 발생할때마다 함께 받는 10%의 부가세는 아예 별도의 통장에 넣어두고 잊어버리는게 좋습니다. 그러면 우선 통장이 하나일때와 달리 회사가 쓸 수 있는 실제 잔고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부가세는 매출의 10%이기 때문에 꽤나 큰 금액인데요. 이걸 잘못 계산하면 이상하게 돈이 많이 남는군 하는 착각을 했다가 부가세 내야 될때 폭탄을 맞게 됩니다.

부가세 통장을 따로 관리할때의 예상치 못하는 이점은 이 통장이 자연스럽게 적금 통장처럼 비상금을 만들어준다는 점입니다. 부가세는 내가 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사업을 하다보면 발생하는 비용이나 매입의 10%는 돌려받게 되므로 전체적으론 매출에서 꼬박꼬박 떼어놓은 10%의 부가세보다는 적게 발생합니다. 그만큼 남은 금액은 예상치 못한 적금이자 비상금이 되어 요긴하게 쓸 수 있습니다. 적자가 나는 회사가 되지 않게 운영하는 유용한 팁이죠.

만약 좀 더 욕심을 낸다면 통장을 하나 더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특히 대표 혼자 일하는 나홀로 회사가 아니라 직원을 채용하게 된다면 반드시 만드는게 좋은데요. 이 통장엔 퇴직금을 쌓아두어야 합니다. 부가세와 마찬가지로 회사를 운영할때 회사의 잔고로 착각하기 쉬운 항목이 직원들의 퇴직금입니다. 당장 나가야 할 돈이 아니므로 실감하지 못하지만 퇴직금 역시 매달 나가는 급여의 1/12 정도가 되고 1년이 되면 한달치 월급 정도가 됩니다. 즉 사업을 하는 사업가 입장에선 열두달 일하고 열세달치의 매출을 확보해야 회사가 적자가 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급여를 지급할때마다 일정정도를 떼어서 퇴직금을 적립해두는게 좋습니다. 이 통장 역시 의외의 효과가 발생하는데 팀원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1년을 채우지 않고 퇴직하는 이들에겐 퇴직금이 지급되지 않으므로 적립해둔 금액이 회사의 수익으로 잡히게 됩니다. 역시나 적자가 나지 않게 관리하는 좋은 방어막이 되어 주죠.

간단한 팁인데 이 팁을 따라 보면 생각보다 효과가 탁월했습니다. 그래서 UFOfactory는 부가세를 내고 나면 통장에 어느 정도 돈이 남아 있었고, 합병하기 전까지 팀원들의 퇴직금은 이미 적립된 상태였지요. 사업체를 운영해 보면 회사의 실제 잔고가 얼마이고, 또 매달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게 제일 중요한데 그 데이터를 심플하게 파악하는데는 위의 팁들이 매우 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사의 현금 흐름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마지막 팁이 있습니다. 그건 신용카드가 아니라 체크카드를 쓰시라는 건데요. 이건 저희에게 늘 소중한 조언을 해 주는 살림세무법인에서 늘 강조하는 항목입니다. 신용 카드를 쓰게 되면 지불이 한두달 미뤄지기 때문에 현금 흐름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생깁니다. 따라서 자신의 사업체가 한달에 얼마를 쓰고 있고, 얼마를 사용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체크카드를 쓰는게 좋습니다. 이 팁은 작은 사업체이고 현금 흐름을 늘 걱정해야 하지만 걱정할 사람이 대표 한 사람밖에 없을땐 정말 중요합니다.

정리하면.. 부가세 통장을 만드세요. 퇴직금도 가능한 매달 적립하세요. 체크카드를 쓰세요 네요. 왜냐하면 작은 회사일수록 대표가 현금 흐름과 잔고를 파악하고, 필요한 매출 목표를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게 중요한데 그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PS. 근데 사실 이 팁은 회사가 2년 안에 적절하게 성장하면 회계를 담당하는 팀원에게 맡기면 되는, 어쩌면 평생에 한번만 기억하면 되는 팁이죠. 그러나 저는 지금 다시 하고 있답니다. 흑.

PS2. 참 그렇게 모은 퇴직금은 1년에 한번 팀원들의 퇴직연금으로 들고 잊어버리세요. 퇴직금은 회사의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제일 좋답니다.

사업을 해 보세요: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저는 그랬어요

벌써 2017년입니다. UFOfactory를 시작한게 2013년 봄이었으니 만으로 4년이 되어 가네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서 지금은 슬로워크와 합병한 UFOfactory. 그 우여곡절을 함께 했던 팀원들은 회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기억합니다. 몇 번을 망했어야 할 회사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라며 그때 그때마다 우리끼리 신기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특히 창업한 이듬해 한 해를 멤버들은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다른 해는 편했냐면 그렇지도 않았구요.

그 시간들을 겪으며 작은 회사는 결국 대표의 그릇과 역량에 정비례한다는 걸 많이 체감했습니다. 내가 가진 문제가 곧 회사의 문제가 되고, 한편으론 내가 가진 장점이 회사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러니 만약 자신을 더 알고 싶고, 또 잔인할 정도로 냉혹하게 부딪히면서 성장을 하고 싶다면 사업을 해 보세요. 강제로 깨닫게 되고, 그 문제들을 하나씩 다룰때마다 강제로 성장하게 됩니다. 만약에 성장하지 못했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회사가 망해 있을 꺼에요.

또한 짧은 4년간이었지만 그 기간동안은 정말로 높은 밀도감과 압박 속에서 지냈습니다. 회사를 창업하고 24시간, 365일 회사 생각을 안 한 날이 없었을 꺼에요. 사업을 하기 시작했고, 아직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며칠만이라도 일 걱정을 하고 싶지 않다면 회사를 그만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뭘 해도 심심하고 재미가 없다면 사업을 시작해 보세요. 하루하루가 짙은 밀도감과 끊임없는 문제들에 지루할 날이 없을 껍니다. 게임을 좋아하지만 사업을 시작한 후로는 어떤 게임이든 길게 붙잡는게 어려워졌습니다. 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몰입감이 높은 당면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요.

마지막으로 사업을 해 보세요,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내가 아무리 진심으로 대해도 그 진심을 상대에게 이해시키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럼에도 조직이 살아남고 일이 진행되게 하기 위해선 무조건 상대의 입장에서 일을 풀어나가야 하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현금이 들고 나가는 것에 밝아지게 되고, 언제쯤 얼마가 필요해지겠구나 하는 감이 생깁니다. 잔고를 채우기 위해서 무얼 해야 하는지도 감이 생기구요. 예전엔 내가 하는 일만 잘하면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 이젠 팀원들이 잘 하는 일 외에는 모든 걸 챙겨야 하는 상황도 겪습니다. 좋은 팀원들이 있다면 그렇고 만약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면 말그대로 A부터 Z까지 하고, 결과를 내놓았어야 할 누군가가 만든 폭탄도 제 때 해치우거나 못하면 안고 터트려야 합니다. 지금 언급한 일들을 하게 되면 이전과 달리 세상이 4K로 레티나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볼 수 없을 디테일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더 궁금하다면 사업을 해 보세요. 몇년이 지나 재무적이든 평판에서든 성과가 없더라도 버티기만 했다면, 이 모든 것들을 자동으로 강제로 알게 됩니다.

물론 저는 별 생각 없이 사업을 시작했기에 사실 사업이 이런 건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배우고 있고, 특히 누구와 협력하면 좋을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편이라 지금도 사람들이 어렵습니다. 그래서라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래도 그 고통들을 겪어내며 무엇을 깨달았는지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나의 뇌세포가 이 기억들을 버리기 전에요.

위태위태했지만 UFOfactory는 4년동안 매 해 두배씩 성장했습니다. 비영리조직과 소셜벤처를 상대로 했기에 이윤을 남기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얼마씩은 통장에 잔고가 남았구요. 무엇보다도 이젠 소셜벤처든 비영리단체든 취직한지 얼마 안 된 담당자가 서버 접속이 안 되서 애가 탈때 “예전 담당자가 안 가르쳐줬는데요”라고 말해도 “잠시만요”하고 찾아주는데가 생겼고, 엄청난 비용을 쓰지 않아도 어느 정도 퀄리티는 나오는 개발사가 소셜 섹터에도 생기지 않았나요. 이 개인적인 공간에 그만큼의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고생을 한 팀원들에게 감사를 남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밴드하듯이 새로운 일하기

맨 땅에 헤딩하거나, 장님 문고리 잡듯이라도 일을 시작하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마음껏 실패하더라도 그 경험이 훗날에 도움이 될테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답도 찾을 수 있을 꺼란 이야기다. 그러나 보통은 그렇게까지 맨땅에 헤딩하거나, 완전히 눈을 감은채 일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게 바람직하지도 않고.

일단 그런 방식에는 절반 이상의 실패 확률에 따르는 비용이 든다. 시간과 현금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몸과 마음에 고통도 따른다. 그리고 맨 땅에 헤딩이나 장님 문고리 잡기는 좋은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동전 던지기랑 다르지 않다. 요리를 배우겠다고 냄비를 불 위에 던져서 놓으며 바람직하게 놓는 방법을 찾아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하는 일일 경우에 대체로 자신이 예전에 했던 경험 중에서 성과가 좋았던 것들을 찾아 보고 우선 적용해 본다. 나는 UFOfactory를 시작할때 “회사를 만들어 본 경험”은 없지만 웹서비스를 만들던 경험을 참고했다. 고객과 직원들의 만족도를 UX라고 생각했고, 어떤 인풋과 아웃풋이 어떤 알고리즘을 거쳐서 나오는게 맞을지 고민했으며, 실제로 회사가 돌아가는데 필요한 핵심기능이 몇 안 될 꺼라는 생각을 하며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작은 실험들을 하며 추려내기도 했다.

중요한건 지금인데, 내년에 새로운 일을 하게 될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 새로운 일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는지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감도 못 잡는 상황이었다. 멤버들의 생계가 달려 있어서 고민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러다 어제 청년허브에서 준비한 국제컨퍼런스에 토론자로 참여하면서 하나의 힌트를 얻었는데 그것은 바로 ‘밴드’였다.

서로 다른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들이 모여서 합주를 한다. 합주 안에서 각자의 재능과 감성에 따라 변주가 일어나고, 그 음악이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5분에서 10분 정도의 곡을 연주하는 동안 동료들과 함께 각자의 악기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꽤나 경이롭다. 누가 들어가고 누가 빠질지, 누군가의 악기가 리드하는 동안 내 악기로 어떻게 서포트할지, 치고 빠지고 함께 달리고, 순간순간 눈을 마주치며 신호를 주고 받기도 하고, 동료의 예상치 못한 애드립에 감탄하고 내가 펼친 연주에 동료들이 눈짓으로 환호하는 등. 또한 그 음악을 듣는 이들의 마음이 열리고 각양각색의 마음들이 공간 속에 뒤엉키며 함께 공유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경험은 음악이 아니면 경험하기 힘든 순간이다.

앞으로의 조직들은 이런 밴드의 합주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직한게 아닐까? 그리고 나도 새로 시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을 합주 방식으로 해 보면 되지 않을까? 전문가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합주하듯이 일을 이어나가는 방식. 이미 15년도 전에 한 경험임에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순간들처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라면 어쩌면 ‘시도는 해 볼 수 있겠다’단 생각이 들었다.

자축 겸 망상

오늘은 12월 5일. 나의 양력 생일이다. 보통은 음력 생일을 기억하는 수준에서 지나가지만, 올해는 양력 생일이 남다른 느낌이었다. 1976년 12월 5일에 태어났으니, 지금 2016년 12월 5일까지 나는 정확하게 40년하고 하루를 맞았다.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수많은 후회들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잘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보통은 시도하지 않을 일들을 시도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상황에 떠밀려서 결정하고, 능력이나 여건이 받춰주지 않을 때에도 내가 좀 고생하지 뭐 라고 생각하면서 시도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사서 고생하면서도, 별로 성과없는 일들을, 눈치없이 많이 한 것 같다. 솔직히 안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싶은 마음은 크지만, 별 다른 수도 없었을게 틀림없다.

꽤나 긴 시간을 지내고 난 지금 한편으론 만족스럽기도 하다. 하고 싶었던 것들을 했고,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했으니까. 내가 정리한 나의 버킷 리스트 3/5 정도가 일정 부분 마무리되었다. 커다란 성공을 거두진 못했어도, 여러 우여곡절들을 버텨내며, 지금 이렇게 살아 있구나 싶어 며칠 전엔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나, 그래도) 이제부터는 내 원래 생각에 가까운 일을, 직접적으로 해야겠단 다짐을 했다.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지금까지처럼 “누군가를 돕고 시너지를 낸다”는 스탠스에만 머물러 있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걸 무엇으로 잡을지 원점에서부터 다시 내 안을 검색해 보고 있다. 내 상상을 뛰어 넘는 일이 잡히기를 바라며.

ps. 이런 모색의 계기가 된 “이제부터 10년 뒤에 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으냐”고 질문을 해 주신 분께 여기에 감사 인사를 남긴다.

척박함 속에서 더디게 자라는 이들

적지 않은 햇수를 살아왔지만 나는 늘 부족함을 느낀다. 어떻게 행동하는게 좋은지, 내 느낌과 생각은 내 것이 맞는지 하루에도 수십번씩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통해 새롭게 얻은 깨달음은 눈에 잘 띄는 메모장에 적어두고 자주 들여다보려고 노력도 한다. 자신을 늘 튜닝하는 느낌, 그러나 앞으로도 부닥치게 될 일들이 무수하게 많다는 걸 알기에 막막한 느낌.

부닥쳤구나는 대개 불편함이 느껴질 때 알아차린다. 그렇다, 아직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상황들이 불편하고 어렵다. 더 정확한 느낌은 “나라는 사람이 불편하고 어려워 한다는 걸 알겠다”이다. 다행히도 “나를 비난”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거나 “상황을 비난”하기보다는,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상황에 부닥쳤구나”라고 생각할 요령은 갖추었다. 그리고 고민을 시작하고 내 답을 찾으려 장님 문고리 잡듯이 노력한다. 그 노력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까이게 하고 다치게 하고 무언가가 망가지게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니까. 그리고 이렇게 된 데에는 두가지 이유 정도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 나 자신이 자라는 속도가 평균에 비해 좀 느린 편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내가 크게 달라진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도 고등학교를 절반이나 다닌 이후에야 보통 이야기하는 사춘기 같은게 찾아왔던 것 같다. 기억 보정이라 정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때 즈음에야 내가 아닌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엔 늘 몸이 허약한 아이였고 그게 정말로 싫었다. 몸이 자라는 것도 정신이 자라는 것도 평균보다는 느리다는걸 아주 어릴 적부터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로 우리집은 넉넉하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을 겪어 보거나, 그 상황 속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에 대한 참고할 만한 꺼리가 부족했다. 부모님들도 충분히 많이 아셨던 것 같지는 않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게 자랑스러운 환경이었고, 부산의 가까운 친척들 중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없었다. 꽤나 공부를 잘 했던 편이었지만, 나는 전액장학금과 기숙사로 운영되는 부산의 모 공업고등학교에 가서 빨리 독립하고 싶었고 그 선택지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대학에 가서야 과학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 직접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나 내 주변이 아는 선택지란게 그 정도 범위였다. 외국대학에 다니는 아이들도 대학 졸업 즈음에나 실제로 본 것 같다. 서울을 가 본게 20대 중반까지 두번 정도였을 뿐이었으니까. 그것도 친구랑 함께 “한번 가보자”라고 해서 여행처럼 가보거나, “시험”을 치르러 고속버스에 실려 간 것이었다. 나는 부산의 가난한 산동네라는 척박한 환경 안에 있었던 셈이다. 친구들 중에서 그나마 잘 사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작은 가게를 하는 집이었고,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잘 사는 동네 아이들이었던 아파트 촌에 사는 아이들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30평을 넘는 집을 본 기억이 없었지만 그 아이들은 그 아이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대학교가 가까웠던 동네였던지라 우리는 매일같이 최루탄을 마셨지만, 어릴 적 우리에게 왜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저러는지 설명해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여러가지가 낯설고 어렵다. 때론 정말 쉽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자라온 척박한 환경이나 더딘 스스로가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도 많다. 그게 내게 주어진 조건이고 자원이겠지만, ‘누구누구를 만나봐라’라고 주선해주는 외할아버지나 친척 어르신, 친한 선배는 커녕 “이제서야 말하는데 말이지”라며 인생 상담을 해 줄 부모님도 30대가 된 이후의 내겐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디 나만 그렇겠나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어서 다행이고, 내가 예측에서 벗어난 행동을 해서 깜짝 놀랐던 이가 있었다면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라며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주말 보내기 – 완전한 이주 준비

숙소에 있는 짐을 하나 하나 정리했다. 사무실에 가져갈 책, 일본으로 가져갈 책, 당분간 읽을 책을 한 곳으로 모으고. 옷가지는 눈에 보이는 곳에 모은 후에 가능한 필요한 것만 남겨두려고 해 본다. 먹을꺼리들은 여간해서는 잘 안 먹으니까 사무실로 옮겨놓았고, 몇 안 되는 식기도 한 곳에 모아둔다. 눈에 보이는게 내 짐의 전부이지만 이것들 중에도 쓰이지 않는게 많다. 생활하는데 내게 필요한건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 지내는 곳의 계약이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계약이 만료되면 가급적 한국에 오는 횟수를 더 많이 줄이려 한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은 상황에서 삶의 기반을 이렇게 국외로 옮겨도 되는걸까 걱정이 든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하는 일이 넉넉해지려는 일과는 무관하긴 매한가지다. 애초에 넉넉함이란게 무엇인지 경험해 본 적도 없던터라, 노력도 안 하면서 혹시나 기회가 올까라는 막연한 바램이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바라는게 아니라.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후에 알게된 것도 두 분의 삶 어떤 순간에도 넉넉한 적이 없었다는 발견이었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에겐 받아야 할 빚들이 있었지만 갚아야 할 것들도 있었기에 우리 형제는 상속을 포기하기로 했고, 어머니는 형과 함께 사는 것과 매달 나오는 적은 보조금 외에는 저금도 벌이도 없었다. ‘매달 생활비를 어떻게 만드셨던 걸까’ 나는 두 분이 돌아가신 후에야 그런 의문이 들었고, 아무 것도 못 해드렸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내가 첫 직장을 다니기 위해 부산을 떠날때, 부모님이 주신 500만원이란 보증금과 지인들로부터 빌리신 돈을 갚기 위해 내가 살던 곳의 보증금을 빼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첫 직장을 다니면서는 얼마 안 되는 비용이었지만, 은행으로부터 빌린 학자금을 갚고 있었고.

물론 나 역시도 넉넉하다는 느낌, 안정감을 가져본 적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없다. 그러니 20대의 내가 부모님의 사정을 더 자세히 알았다한들 무얼 할 수 있었겠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이렇듯 목만 내어놓고 먼 곳을 수영하는 느낌 아니겠나 짐작하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버텨낼 각오였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만드는 조직의 구성원들의 먹고사니즘을 가장 먼저 걱정하는 까닭도 내가 해 온 경험과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일 테고. 부산의 가난한 산동네 아이였던 내가 기술 하나로 버텨온 것처럼 그들이 기술로 밥벌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제 앞가림도 여전히 못하면서 말이다.

빠흐띠 : 세개의 플랫폼

지금 작업중인 나의 크롬 탭을 보니 빠띠, 가브크래프트, 카누 3개가 있었다. 1년간 이런저런 여러가지 실험을 하며 빠흐띠 팀이 모은 세가지 조각이다. 사람과 사람을 단순히 연결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상호 존중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관계를 맺게 할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사는 세상에 더 나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퍼트릴지에 대한 빠흐띠 팀이 내놓는 답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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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워크, UFOfactory 합병도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가는 시점이고. 빠흐띠도 1년간의 실험을 정리하고 이제 본격적인 프로덕트 개발, 본격적인 마케팅, 본격적인 컨텐츠 및 커뮤니티 발굴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기능의 강약도 없고, 컨텐츠 발굴도 없이 빠흐띠 팀은 개발자들만 모여 실험해 보고 싶은 건 다 해 본 한 해였다. 카누는 두번 만들어봤고 (앱까지 치면 3번인가?), 빠띠는 우리가 아는 모든 서비스를 다 흉내내 보았고, 가브크래프트는 나는 알아야겠당, 국회톡톡 등으로 여러가지 접근을 실험해 보았다.

아직도 난 민주주의 플랫폼을 기획하고 개발할때 두근거린다. 이 두근거림만으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순 없겠지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끼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나씩 해 나가고, 그 네트워크가 함께 세상을 바꾸면 좋겠다. 오늘도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살고 싶다. 그게 내 사심.

관악산에 올랐으니 후지산에 도전하자

UFOfactory를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몇 년 고생한 후에 문득 든 느낌은. 에베레스트산에 올라야겠단 거대한 목표가 있었던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관악산 정도를 등반했구나 싶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른 이 산에서  내려가 다시 한번 등반을 한다면 한라산이나 백두산, 후지산 정도는 단번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목표를 그렇게 세워 보기로 했다. 아무 것도 없던 시절 그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했다.

빠흐띠는 개발합니다, 민주주의를

 

UFOfactory의 슬로건은 ‘우리는 개발합니다, 소셜임팩트를 ( UFOfactory develops social impact)’이었습니다. 덕후들에게 잘 알려진 왈도체 스타일로 만들었죠. 빠흐띠는 소셜임팩트 중에서도 민주주의만을 다루는 소셜벤처이자 개발자 조합입니다. 빠흐띠의 슬로건은 “유쾌한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드는 개발자 조합 빠흐띠”이고, 영문으로는 “Parti develops democracy”라고 표현합니다.

민주주의를 개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빠흐띠는 민주주의가 기술을 통해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개발자들의 조합입니다. 우리는 시스템과 문화를 바꿔내는 기술의 힘에 집중합니다. 이제 와서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인터넷은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에서부터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바꿔 내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제가 중학생 시절 피씨통신을 접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테고, 지금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을 만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지금도 여전히 어떤 대학에 입학했는지가 누군가의 전문성과 앞으로 만날 사람을 결정합니다만, 인터넷이 그 기능을 빠르게 대체해 나가는 중입니다.

빠흐띠가 더 민주적으로 바꾸려는 시스템과 문화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발언하고, 이에 공감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수다를 떨고, 그 힘으로 행동에 나서는 과정입니다. 작은 조직에서부터,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 이르기까지, 더 민주적인 시스템과 문화가 필요한 곳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몸담는 팀에서부터 국회나 행정부, 언론과 기업 등등에 이르기까지 제한이 없습니다. 이 모든 곳에 발언하기, 공감하기, 수다떨기, 함께 행동하기를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빠흐띠의 작업을 단순하게 말하면 발언하기, 공감하기, 수다떨기, 함께 행동하기를 새롭게 정의하는 플랫폼을 개발하기입니다. 작은 팀 내부의 소통은 ‘카누‘를 통해, 시민들이 모이는 온라인 광장은 ‘빠띠‘를, 그렇게 모인 힘을 국회나 더 나아가 행정부, 기업에 전달하고 소통하는 플랫폼은 ‘나는 알아야겠당‘과 ‘국회톡톡‘의 실험을 거쳐 ‘가브크래프트’를 만들 예정입니다만, 이 작업들의 본질인 ‘민주주의를 개발한다’의 의미는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을 민주적으로 개선한 시스템을 개발하고 보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더 나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가 우리에겐 중요합니다. 어떻게 발언하고, 어떻게 공감하고, 어떻게 수다를 떨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1과 0이 분명한 코드로 만들어 시스템에 반영해야 하니까요. 다음엔 우리가 적용하려는 “더 나은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로서는 이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곳이 매우 흥미로운데요. 함께 공감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