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시 약속과 약속 사이에 빈 시간이 생기면 커피숍을 찾습니다. 오전 일찍부터 저녁까지 회의 혹은 약속이 있는 날에는, 더는 커피를 마시기 힘들 정도로 계속해서 커피숍을 들락날락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럴 때면 공원 나무 그늘 의자에 앉아 바람을 쐬고 싶습니다. 쾌적한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즐겁지만, 우리에겐 공원과 같은 공공 공간도 필요합니다.
공간에 대한 단상을 인터넷으로 옮겨볼까요? 대부분의 인터넷 서비스는, 사용자를 ‘데이터를 제공’하거나, ‘구독료를 지불’하거나, ‘물건을 구매’하는 고객으로 바라봅니다. 집에서 일터로 이동할 때 우리는 골목과 도로라는 공공 인프라와 버스, 지하철이라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지만, 인터넷 공간에 접속할 때는 어떤 형태로든 비용을 지불합니다. 서비스의 질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디지털 사회는 디지털 경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소비자이기 이전에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시민의 정체성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이 늘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과 기술은 더 나은 디지털 사회를 만드는 기반이 됩니다. 물건을 사고팔거나 재미있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만큼, 다양성과 포용, 신뢰와 협력, 분권과 자율을 위한 디지털 기술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합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좋은 대화를 이어가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거나 의사결정을 내리는 등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인터넷에서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면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어 다양하고 효과적인 집단 협업이 가능한데도, 우리는 이를 사회적 대화나 사회 문제 해결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터넷 상에서는 혐오와 불신, 허위조작정보와 악의적인 글로 피해를 보는 이들이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술과 기능의 제약은 곧 시민성의 제약으로, 더 나아가 공공성의 제약으로 이어집니다. 공공성에 기초한 디지털 사회를 만들려면 디지털 시민의 정체성을 확대해야 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과 기술이 시민들에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공성을 목표로 하는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고 운영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디지털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플랫폼은 누가 만들 수 있을까요? 정부가 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은 양극화된 정치 상황으로, 정부가 이런 플랫폼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에는 부담이 따릅니다. 정권이 바뀌면 시민 참여와 협력 사업은 중단되기도 합니다. 양극화된 정치 상황에서는 기업 역시 투자에 나서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재무적 투자는 투자금 회수를 위해 투명하기보다는 단순하고 효과적인, 공유보다는 독점 구조를 지향합니다. 이는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거버넌스를 구성하고, 독점보다는 공공성을 우선하려는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의 목적과 안타깝지만 배치됩니다.
결국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이들은 ‘시민’이 아닐까요?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지키며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과 기술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빠띠는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구조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시민과 공적 가치를 지닌 조직이 플랫폼을 만드는 조직의 재무 기반 형성과 개발과 운영 과정에서 생기는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플랫폼을 만드는 협동조합도 낯선데, 플랫폼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시민이라니…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기업을 넘어 시민의 힘으로 디지털 사회의 필수 인프라를 만들고 유지해 보면 어떨까 라는 상상은 매우 즐겁습니다. 한국 사회에는 낯설지만, 오히려 사회적협동조합의 역사와 경험은 깊고, 사회의 공공성을 유지하려는 시민의 역사와 경험도 아주 깊고 넓습니다. 인터넷 기술의 근간도 오픈소스 커뮤니티로부터 나왔고요. 빠띠는 그 역사와 경험을 디지털 사회에서도 이어가려고 합니다.
더 많고, 더 나은 디지털 민주주의 기술은, 다양한 처지와 입장의 사람이 목소리를 내고 좋은 대화를 나누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합니다. 공공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기술은 서로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국민/비국민이라고 낙인찍거나, 특정 진영이 배척하는 상황을 넘어설 것입니다. 오랫동안 갈등과 혐오를 조장해온 우리네 정치를 넘어 다양성과 포용, 신뢰와 협력에 기반한 진짜 민주주의를 오롯이 시민의 힘으로 이룰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짜 민주주의는, 여러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당한 이들을 진정한 일원으로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과정이나 현재의 상황으로나 진정한 민주주의가 지금 우리에겐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의 디지털 민주주의 기반을 만들고 이 기반이 공공성을 유지하도록, 한국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기반을 다지고 다양한 시민을 포용하는 사회가 되도록, 빠띠와 함께 하는 시민, ‘빠띠즌’이 되어 주세요. (빠띠즌 되어 빠띠 후원하기)
빠띠의 후원회원 제도인 빠띠즌을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는 글입니다. 빠띠를 통해 하려는 민주주의 혁신의 내용을 설명하며, 이 일을 하게 된 개인적인 이유도 함께 정리했습니다. 그렇기에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부담스럽습니다만 앞으로 여러 시행착오를 인내하며 노력하겠단 약속이기도 합니다.
안녕하세요. 빠띠 이사장 권오현입니다. 오늘은 오랫동안 드리고 싶었던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직접 글을 씁니다. 다소 긴 이야기지만, 끝까지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왜 ‘빠띠’라는 조직을 시작하셨나요?”
강의를 하거나 미팅을 할 때 종종 받는 질문입니다. ‘민주주의를 혁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하는 건지, 어떻게 이리 오랫동안 해 올 수 있었는지 많이들 궁금해하시죠. 디지털 미디어와 커뮤니티 플랫폼 기술을 활용해 개인에게는 권한과 정체성을 부여하고, 집단 내에 의사소통/결정 체계를 구축하는 일을 약 20년간 한결같이 해 온 저를 신기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처음 다짐했을 때 떠올린 소명은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자’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이었던 저는, 스스로는 힘든 삶을 살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선한 보통 사람들이 교회라는 공동체에 모여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가난과 기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그 꿈을 내려놓아야 했고, 새로운 목표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때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프로그래밍 기술을 바탕으로 웹 관련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난제를 해결합니다 민주주의는 나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새 소명을 찾던 저는, 어렵게 사는 이웃들을 돕고 미비한 제도를 개선하려 노력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조직 내에서는 더 잘 협력하고, 밖으로는 더 널리 알려져서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끌어내는데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덕분에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는 일, 다양한 사람이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일, 인터넷을 통해 조직과 커뮤니티 체계를 만드는 일, 사회 제도를 하나씩 바꿔나가는 일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자원이 아무리 많아도, 시스템이 건강하지 않으면 필요한 이들에게 그 자원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소외 당하고, 정의롭지 않은 상황 속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는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함께 협력하지 못하는 환경과 문화에서 생겨납니다. 제가 처음 소명으로 추구했던 ‘가난’과 ‘기아’ 역시, 국민에게 권력이 주어지지 않고 정부를 감시하거나 정부를 운영하는 제도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흔히 ‘인터넷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소통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제게 인터넷 기술(디지털 기술)은 연결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고, 소통을 통해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정보를 습득하며, 논의에 기여하고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시대의 가능성이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지요.
인터넷 기술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와 의견이 전체 시스템에 반영될 수 있게 만들 수 있고(더 많은), 소수와 전문가의 의견이 존중받으면서도 다수를 중심으로 한 절차를 통해 내려지는 집단 결정을 신뢰하게 만들 수 있고(더 나은), 개인과 집단이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하고 공동 소유하는 시스템(일상의)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빠띠의 슬로건인 ‘더 많고, 더 나은, 일상의 민주주의’에 이 가능성을 담았죠.
이렇게 민주주의는 사회의 여러 과제를 해결하는 핵심 전략이지만, 또한 우리 각자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함이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물려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저는, 사회 속에서 제 생각과 의견이 존중 받기를 바랍니다. 제가 거두는 성공과 실패에 무관하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 받고 싶습니다. 제 목소리가 존중받는 것만큼 다른 이의 목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사회가 풍요로움과 지속가능함을 추구하면서, 공정하고 따뜻하게 운영되도록 저 역시 기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혐오와 차별, 불안과 각자도생이 늘어나는 사회 속에서 자원과 권한이 부족한 개인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선 우리 모두는 스스로 권한을 쟁취해야 합니다. 동시에 협력하여 사회 구성원 누구나 이용 가능한 사회 기반을 늘리고, 이를 투명하고 공정하고 따뜻하게 운영해야 합니다. 물질의 풍요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민주주의를 통해 다양한 구성원들이 기여하고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 수 있고 저는 공정하고 따뜻한 사회 속에서 나와 우리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디지털 민주주의 기반과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려 합니다
빠띠를 통해 행복한 개인, 협력하는 사회, 신뢰하고 지지받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의 오랜 과제와 당면한 문제를 더 많은 사람의 참여와 이해, 공감과 지지로 해결할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디지털 민주주의 기술이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빠띠는 공론장, 커뮤니티, 캠페인, 데이터,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운영해 왔습니다. 모두 앞서 말씀드린 목표를 향해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 서로 협력하고, 이를 제도나 문화/시스템으로 안착시키도록 플랫폼을 만들고 방법론을 퍼트려 왔습니다. 진영과 지역, 주제를 넘나들며 다양한 기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기획과 운영으로 빠띠 방법론의 내재화를 돕기도 했습니다.
빠띠가 기획/운영한 ‘민주주의 서울’과 여기서 만든 시민협력플랫폼 모델은 널리 퍼져 많은 지자체의 기본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시민과 기관이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공론장과 워킹그룹 모델은 요즘 시대의 당연한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협력하는 거버넌스와 공론장을 손쉽게 만드는 빠띠 믹스, 공통 관심사로 모인 그룹과 조직이 활용하는 빠띠 카누, 국회와 지자체뿐만 아니라 기업을 대상으로 시민의 목소리를 모아 전달하는 빠띠 캠페인즈, 구성원의 의견을 재밌게 모으고 함께 결정하는 빠띠 타운홀 등 빠띠의 민주주의 플랫폼도 늘어났습니다. 시민 주도로 데이터를 활용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생태계를 만들려던 빠띠의 노력은 ‘코로나19 공적 마스크 데이터 개방 및 앱 개발’과 시빅해커의 커뮤니티인 ‘코드포코리아’의 발족으로 이어졌습니다. 허위 조작 정보에 함께 대응하는 시민을 양성하는‘팩트체크넷’도 빠띠와 언론인 현업 단체의 협업으로 탄생했습니다. 매년 빠띠의 경험과 방법론을 퍼트리고 현장을 지키는 파트너들의 경험을 나누는 ‘민주주의 캠프’도 시작했습니다.
플랫폼을 만들고 현장 곳곳을 다니면서 민주주의가 가진 가능성을 더 실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술 발달로 인해 가속화되는 혐오와 갈등, 기술과 자본의 쏠림 등을 보며 절박해지기도 합니다. 빠띠의 민주주의 플랫폼을 개선하고, 민주주의 방법론 교육과 홍보도 확대하며 사회 곳곳에 혁신적인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싶지만, 투자나 후원 없이 운영되는 조직의 한계를 느낍니다.
빠띠 후원으로 디지털 민주주의 공공재를 함께 만들어주세요
빠띠는 앞으로 민주주의를 혁신하고 보급하는 일에 더 많은 동료 시민의 참여를 요청하고자 합니다. 우선 이 글을 보고 계신 여러분께 빠띠의 후원회원인 ‘빠띠즌’으로 함께 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빠띠즌은 ‘Parti(빠띠)’와 ‘Citizen(시민)’의 합성어로, 시민과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은 빠띠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빠띠가 민주주의 방법론과 플랫폼을 더 잘 만들고, 더 많은 시민의 역량 강화에 기여하고, ‘당사자와 시민의 참여로 이해와 공감, 지지와 신뢰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장’을 만들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십시오.
빠띠는 민주주의 플랫폼과 방법론을 더 널리 퍼트려 우리 사회의 공공재로 만들고 싶습니다. 공공재이니 만큼, 이 디지털 민주주의 자산을 만들고 운영/소유하는 과정에도 시민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믿고, 그렇게 실현시키려 합니다. 다른 어떤 기술보다도, 사회 구성원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소통하고 협력하는데 필요한 기술은 그 자체로도 공적 자산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은 ‘빠띠’뿐만 아니라 이 공공재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자’는 어린 시절의 제 바람은, ‘개인의 권리를 확대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협력하고 신뢰하는 시스템으로 건강한 공공재를 만들고 운영되는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일로 수렴되었습니다. 좋은 민주주의가 만들어낼 더 좋은 사회에 대한 믿음이 변치 않았기에 오랫동안 이 일에 매진할 수 있었고, 지금도 이 기대를 공유하는 동료/파트너들과 즐겁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로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열정을 가진 선한 사람들이, 그들의 기술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동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디지털 기술이 독점과 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고, 공유와 공감의 시대를 여는데 기여하도록 빠띠를 후원해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빠띠는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기술의 공적 가능성을 우리 사회의 공공재로 구현하는 데에 기여하겠습니다.
‘시민제안 → 행정 답변 → 행정 실행’이라는 기존 제안 플랫폼의 프로세스를, ‘시민과 서울시의 공동제안 → 시민숙의 → 시민결정 → 각 단위 실행’으로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보다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단계별 장벽을 낮추고, 작동 구조와 운영 체계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플랫폼 디자인에 너무 많은 힘을 쓰지 않기로 했는데요. 외관이 아름답거나 어떤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지향하는 바를 확실히 보여주고 실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사용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름에는 민주주의 상징성이 높은 ‘광화문’을 넣으려고 했으나 준비 도중 ‘광화문1번가’가 나오면서 2순위였던 ‘민주주의 서울’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민서’라는 애칭을 붙였습니다.
빠띠는 ‘민주주의 서울’을 ‘민서’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신규 개발이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천만상상 오아시스’를 수정 개발하여 민주주의 서울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능을 붙이기 보다 덜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시민제안은 더 간단하게 입력해도 되도록 변경했습니다. 투표는 일단 찬반 기능으로 구성하고 투표에 참여하는 시민은 반드시 의견을 남기도록 해 토론에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외에는 실행 상황과 소식을 알려주는 게시판만 남기고 다른 기능은 모두 가리기로 했지요. 프로세스 역시 간단하게 구성했는데요. 하나의 시민제안에 50명이 공감하면 공무원이 답변을 해야하고, 500명이 공감하면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는 투표와 토론이 시작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5000명이 투표와 토론에 참여하면 시장이 직접 답변하도록 구성했습니다. 가능한 명확하고 쉽게 기억할 수 있는 플랫폼과 프로세스를 만들려 했습니다.
바깥은 간단하게, 내부는 촘촘하게
운영팀은 대외 고객은 시민으로, 대내 고객은 공무원으로 설정했습니다. 목표는 세 가지였습니다. 시민대상으로는 ① 쉽고 간단한 플랫폼을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게 하기 ② 발언할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직접 찾아가기로, 공무원 대상으로는 ③ ‘일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협업에 대한 긍정적 경험’을 제공하기로 잡았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 필요한 일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운영팀이 바빠졌지요. 우선, 시민제안을 일선부서에 전달하는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500명이 공감하는 시민제안을 검토하고 시의 자료로 보충한 후 공론화 하는 방식을 기획했으며, 공론화 여부를 판단하는 시민기획단도 구성했습니다. 500명이 공감하지 않은 제안이라도 반복되는 제안이거나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제안은 기획단의 여력에 따라 살필 수 있는 프로세스도 만들었습니다. 투표와 토론, 즉 숙의 단계에서는 가능한 시민이 균형잡힌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시가 가진 모든 자료를 모아서 사전 검토를 한 후 여러가지 유형을 실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질문 표현을 정하는 데에만 2주 이상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안 → 검토 및 기획 → 숙의 → 담당 공무원과 시장 답변 준비 → 답변’ 전반에 이르는 내부 프로세스와 협력 체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플랫폼의 존재를 모르거나 플랫폼에 접근할 상황이 여의치 않은 시민을 만나 제안을 받는 ‘찾아가는 시민제안’도 만들었습니다.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제안과 숙의, 투표가 진행되는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투표와 토론 단계에서는 해당 주제를 다루는 오프라인 시민토론회를 열고, 주제 관련 장소를 찾아가 부스를 열어 시민의 투표와 토론 참여를 독려하기로 했습니다. 시범사업 기간 동안 한강시민공원, 어린이대공원 등의 현장에서 민주주의 서울 부스를 설치, 운영했습니다.
‘찾아가는 시민제안’ 어린이대공원 편
시민의 제안을 받는 것을 넘어 ‘서울시가 묻습니다’를 통해 잘 정제되고 준비된, 그러나 시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서울시 정책을 시민과 논의하는 프로세스도 구성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을 대상으로 설명과 홍보를 통해 이해를 도왔습니다. 일선 부처에서 민주주의 서울로 협조 요청이 올 경우를 대비하여 응대를 위한 안내 메일과 리플릿, 일정 가이드, 역할 구분과 예산에 따른 시민 참여 범위를 명시한 운영팀 업무 체크리스트 등도 제작했습니다.
사업 기간 내내 전담 인력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2017년 첫 해의 담당공무원은 1명이었지만, 2018년에는 5명으로, 2019년에는 20명에 가까운 조직으로 성장합니다. 빠띠와 서울시는 MOU를 맺고 담당공무원과 1대 1로 매칭되는 민서 운영팀을 시 외곽에 구성했습니다. 담당공무원은 예산과 시 내부 공무원 대상 업무를 진행하고, 외부 운영팀은 기획과 운영을 하면서 유기/협력적으로 사업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물론 많은 노력과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플랫폼을 만드는 것을 넘어 ‘잘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제안을 서울시가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험을 시작해 봅시다
‘시민과 서울시가 제안하고, 시민이 함께 논의해 결정하면, 서울시가 실행한다’는 컨셉의 민주주의 서울은 2017년 10월 베타 오픈을 알리며 실험(시범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018년 지방선거 직후부터는 ‘서울의 공론장’이라는 컨셉으로 남은 시범사업을 이어나가며, 2019년 본 사업을 위한 예산과 조직을 정리했습니다.
우선 숙의와 토론 단계의 준비와 운영, 이후 정책에 도움이 되는지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첫 단계로 ‘서울시가 묻습니다’를 먼저 실행했습니다. 첫 주제는 ‘비상용 생리대를 공공기관에 비치’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좀 더 거시적인 정책을 논의할 수도 있었지만, 시민 생활에 밀접한 정책에 대해 의견을 묻는 것이 지방자치단체 플랫폼에는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여성정책과의 제안을 받아 ‘비상용 생리대’에 관한 토론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공공기관 화장실 비상용 생리대 비치’ 투표/제안 홍보 포스터
간단해보이는 질문이지만 준비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특정 성별에 대한 특혜가 아니냐는 시비에 휩싸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서울 프로세스 역시 만들어가는 중이었고요. 질문의 형식과 표현, 시민 대상 제공 정보의 취합과 검증, 정보 제공 방식, 홍보 방안 등을 결정하는 데에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행정과 빠띠 운영팀은 반복적으로 콘텐츠의 방향과 질문 형식을 다듬었습니다. 이 정책을 통해 이루려는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시민 의견을 어떻게 반영하고 보고할지 등을 논의하고 확인해나갔습니다.
이렇게 준비해서 진행한 토론은 1개월 간 별 문제 없이 많은 시민의 공감을 받으며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서울시는 비상용 생리대 정책을 시범사업으로 진행한 후 다음 해에 확대 적용했습니다. 정책이 가지는 의미와 함께 시민 숙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 등을 인정받아 UN으로부터 공공정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시민제안을 받아 정책으로 만드는 과정이 초기 단계인 것만큼이나 정부 실행 정책에 대해 시민 의견을 받고 반영하는 과정도 여전히 초기 단계이며, 충분히 실현이 가능하다는 걸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찾아가는 시민제안’에서는 가장 먼저 한부모 가정 커뮤니티 및 단체와 함께 서울시에 바라는 정책을 함께 논의, 발전시킨 후 플랫폼에 제안으로 올리는 현장워크숍을 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생계까지 도맡느라 힘든 시민에게 지자체가 작지만 다양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필요하고 적합한 정책은 현장의 시민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소득이 10원 초과해서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아이를 돌보다가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연락할 곳이 없어 112에 전화할지 고민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시민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데 행정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지요.
실험에 주어진 예산은 적었지만 홍보도 진행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포스터와 리플릿을 제작하고, 운영팀이 시청 곳곳을 직접 뛰어다니며 포스터를 부착했습니다. 시민과 함께 정책을 준비하거나 정책 시행 전에 시민 의견이 듣고 싶다면 언제든 연락해달라는 메시지, 시 조직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찾아주겠다는 메시지를 담아 행정 내부 영업에 나섰습니다. 시민이 많이 모이는 광화문광장에 나가 ‘시민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반영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깜짝 시민 기자회견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민주주의 서울에 대한 고민과 준비, 실험은 2017년부터 2018년 말까지 1년 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민주주의 플랫폼 5단계 계획 수립과 1단계의 실행
지금은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민제안플랫폼에 비슷한 모델을 사용합니다. 시민이 제안하거나 기관이 질문합니다. 정해진 인원 이상이 공감하는 제안에 대해서는 행정이 답변하고, 시민과 전문가, 공무원이 참여한 기획 과정을 거쳐 숙의로 넘어갑니다. 숙의 단계에서도 일정 인원 이상이 참여하면 단체장이 답변하며 실행 가능한 약속을 공표합니다. 이러한 전체 과정은, 빠띠가 민주주의 서울을 운영하며 고민하고 실험하는 과정을 통해 발견한 모델입니다. 빠띠는 민주주의 서울을 발전시키며 ‘민주주의 플랫폼’의 5단계를 수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차용 중인 모델이 우리가 계획하는 5단계 중 첫 번째 단계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2021년은 빠띠가 항해를 시작한 지 5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방향키를 잡았던 2016년의 첫 마음이 떠오릅니다. 다섯해가 지나는 동안 빠띠는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기반의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고, 시민이 직접 기술과 데이터를 활용해 여러 사회를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거나 암초에 부딪혀 흔들리기도 했지만, 민주주의라는 나침반을 따라 이내 방향을 찾고 항해를 계속해왔습니다.
5년이라는 활동을 통해 빠띠는 ‘시민이 자신의 공동체나 지역의 공론장에 참여해 협력적으로 소통하고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공간에 ‘시민협력플랫폼’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양한 현장에서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 실험을 통해 시민협력플랫폼의 모습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시민협력플랫폼과 관련한 그간의 활동을 모아 ‘민주주의 항해일지 1.0’를 연재합니다. 1.0이라는 버전명을 붙인 것은, 시민협력플랫폼이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빠띠가 항해를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나은, 더 많은,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협력플랫폼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연재물을 읽으시며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이 제안하고 시민이 결정하는 민주주의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민서)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빠띠는 민서의 기획단계부터 결합하여 운영(2018~2019)까지 함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의 경험과 치열했던 고민을 통해 시민협력플랫폼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시민협력플랫폼에서 민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지금 시작합니다.
‘민주주의 서울’은 행정이 기존에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공간이자, 그 자체가 실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빠띠는 총괄 기획이라는 역할을 맡기 전, 서울시에 두 가지를 제안했습니다.
첫째, 서울시와 빠띠는 갑을 혹은 자문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다(구체적으로는 MOU). 둘째, 일정기간의 실험을 통해 플랫폼과 과정을 만든다.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고 적합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애자일’이라는 개념이 보급되면서 확산됐지만, 법과 제도에 따라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가 성과가 불분명한 ‘실험’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서울시는 빠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실험을 하며 민주주의 서울을 그야말로 찾아나섰습니다.
2017년 2월 9일 빠띠와의 첫 미팅을 마친 서울시 담당자는 내부에서 민주주의 플랫폼 구축을 추진했습니다. 빠띠는 약 6개월 동안 정식 계약이 아닌 자문으로 민주주의 서울을 만드는 데에 기여를 했는데요. 2017년 10월, 민주주의 서울이 베타 버전으로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앞서 말씀드린 실험의 시간을 보냈고, 2019년에 이르러서야 예산과 전담팀을 갖추고 정식 출범할 수 있었습니다.
2017년 당시에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를 정부 운영에 담아내야 한다는 사회적인 기대가 있었습니다. 간단하게는 시민이 제안하고 투표로 결정하면 행정이 실행한다는 내용이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과제를 해결하고 어떤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지 설계가 필요했습니다.
우선, 서울시민의 범위를 정해야 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주민등록을 한 시민 외에도 많은 사람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사람도 일하고 생활하고 투자를 합니다. 적어도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는 시민의 범위를 ‘주민등록’으로 한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확대하면, 1천만이 아닌 2천만에 가까운 사람을 대상으로 플랫폼을 구상해야 했습니다. 대상의 범위가 커질 수록 플랫폼은 더 간단해져야 하고요. 시민이 제안하면 공무원이 답변하던 시절을 넘어 시민이 직접 제안하고 동료 시민과 함께 결정하는 민주주의를 디지털 기술로 실현할 수 있을까요?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은 확실했지만 밟아야 할 단계는 없는지 점검이 필요했습니다. 빠띠는 이 단계를 파악하고, 단계별로 민주주의 서울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정리했습니다.
10만 명 혹은 20만 명은 절대적으로는 결코 작지 않은 숫자지만, 플랫폼이 전체 이용자로 상정하는 2천만 명에 비하면 극히 적은 비율입니다. 0.5% 혹은 1%가 원하는대로 도시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법으로 규정된 주민투표는 유권자의 3분의 1이상 투표가 진행되지 않으면 결과조차 공개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에서도 이에 준하는 결정 기준을 가져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대표성을 확인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일한다’ 혹은 ‘산다’는 개념은 단순하지만, 플랫폼 이용자가 실제 그러한지를 사용성을 해치지 않으며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실명(實名)과 주민의 자격 인증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투명하게 알리면서 데이터를 검증할 경로를 확보해야 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은 정당성과 대표성 확보를 위해 해결이 필요한 제도적이면서도 기술적인 과제였고, 최소 2~3년의 시간이 필요한 사안이었습니다.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는 시민의 범위를 ‘주민등록’으로 한정할 수 없었습니다.
시민의 제안이 정책으로 연결되기 위한 조건
사실 서울에는 ‘천만상상 오아시스’라는 플랫폼이 있었습니다. 2006년 개설된 천만상상 오아시스는 UN전자정부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전 세계를 놓고 봐도 우수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7년에는 작동이 멈춘 상황이었습니다. 기존의 시민 제안 플랫폼이 왜 잘 운영되지 않는지 그 이유도 파악해야 했습니다. 여러 실질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민의 제안이 공무원 답변 이후 정책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보였습니다. 일부라도 반대하는 시민이 있는 제안은 일선 공무원이 수용하기에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시민의 제안은 정책전문가에겐 허점이 많고 완성도가 떨어졌습니다. 시민 피부에 와닿는 쓰레기, 주차, 교육 등의 문제는 서울시청 담당이 아니거나, 조례 혹은 예산을 변경해야 하는 시의회 사안이거나, 갈등관리를 통해 다뤄야하는 사안이었습니다. 새로운 제안을 실행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그 업무를 떠안아야 하는 공무원의 입장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기존의 업무 방식이나 시민제안에 대한 인식 변화, 인센티브 구조의 변화 없이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일선 공무원의 판단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시민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구조 구성. 시민 개인이 쉽게 제안한 것도 정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 마련. 제안이 다양한 경로로 전달/검토되어 실행되거나 예산/조례로 이어지도록 다양한 기관과의 협력 체계 구성.
이를 위해서는 서울시장의 리더십도 필요했습니다. 변화한 시대에 시민 제안의 가치를 강조하며 시정 전반의 분위기는 물론 보상 체계와 연결해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숙의성’
숱한 고민과 분석으로 우리가 만드는 민주주의 플랫폼이 ‘숙의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플랫폼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대표성의 문제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채 자신의 제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통로로 활용하는 공간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시민 한 명의 제안은 단순한 아이디어일 수 있지만, 행정이 가진 정보와 자원을 활용해 더 많은 시민이 상황을 이해하고 힘을 합쳐 제안을 발전시킬 수 있는 틀을 갖춰야 했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교육청, 산하기관 등)나 권한을 가진 공무원과 의원이 하나의 제안이 정책이 될 때까지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야만 시민이 플랫폼을 신뢰하고, 이곳에서 일어나는 결정이 정당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시민과 서울시가 제안하고, 시민이 함께 논의해 결정하면, 서울시가 실행한다’는 방향성을 가지되, 그 중간 단계로 서울 시민 누구나 함께 논의하는 ‘서울의 공론장’이라는 컨셉이 드디어 완성됐습니다.
부모로서든 동년배로서든 혹은 시민으로서든 인간으로서든 “내가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 강하게 퍼지기 시작한 시점을, TV화면을 통해 세월호가 가라 앉는 장면을 지켜 보기만 해야 했던 때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행동이 커다란 임팩트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가만히 있기에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던 한 명, 한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각자가 가진 기술로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오도록 이끌어 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하면서 사람들이 집 안에 갇혀버렸을 때, 공공의 역할과 정책적 판단 하나 하나가 중요해진 시기이기도 하지만,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민들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마자 확진자의 동선을 비롯한 코로나 현황 데이터를 동료 시민들이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개발한 시민 개발자들은 전세계에서 나타났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위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정확한 정보 제공을 위해 정보 공개를 서두르고 일일 브리핑을 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다면, 사회 곳곳의 시민들에게 다양한 채널과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시민 개발자들이 함께 했다.
공적마스크 재고 데이터를 비롯한 코로나19 관련 데이터 개방을 이끌어낸 코로나19 공공데이터 공동대응도 유사한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정부가 코로나19 판데믹 상황을 해결하는 동안 집 안에서 가만히 기다기 보다는, 판데믹을 겪는 당사자이자 동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할 일을 찾아 함께 해결하기 위해 코로나19 공공데이터 공동대응은 출발했다. 정부는 정확한 데이터를 신속하게 제공하고,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시민들과의 채널은 현장의 시민들이 직접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민과 관의 협업 체계에 대한 믿음 또한 바탕에 두고 있다. 주로 공적 마스크 재고 현황을 보여주는 지도 서비스가 만들어졌지만, 한 고등학생 개발자는 음성으로 내 주변의 마스크 재고 현황을 검색하는 서비스를 만들었는데, 공적 마스크 데이터 개방을 정부만의 프로젝트로 진행했다면 아마 우리는 음성 인식 서비스를 만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공공데이터 공동대응과 정부는 불과 일주일만에 공적 마스크 재고 데이터를 공개하고 앱을 보급했다
이웃이나 자신, 더 나아가 공익을 위해서 행동에 나서는 시민의 등장과 활약은 우리 사회가 디지털 전환을 서두르는 시점에 놓치지 않아야 할 핵심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코로나19 극복을 넘어서 사회의 디지털 전환을 이뤄내겠다는 한국판 뉴딜은 이 핵심을 놓치고 있다. 급격히 줄어드는 일자리로 인한 실업의 충격을 1차적으로 막아보려는 의도를 담은 디지털 뉴딜 정책임을 이해하지만, 정책의 바탕에 디지털 정책은 인프라 구축과 신산업 육성을 통한 경제 활성화 정책이란 인식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데이터는 ‘원유’라는 표현과 함께 ‘산업의 주요 자원’으로서의 데이터를 정부 주도하에 일방적으로 모으고 개방하는데 집중하는 경향 역시 발견된다. 정부의 역할을 디지털 전환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디지털 전환의 방향이 산업의 육성과 인재의 양성에 두는 방식은 오랫동안 우리 정부가 익숙하게 활용해온 성공 공식이지만, 코로나 이후의 시대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동시에 글로벌 경제가 작동하던 기존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회 각계의 주장을 놓치고 있다.
한국판 디지털 뉴딜에 시민의 역할은 없다
코드포코리아를 통해 공적 마스크 데이터 개방을 제안하고 앱 개발에 참여하고, 개인 안심번호의 제안과 개발을 진행하면서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할 혁신이 시민에게 이미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다. “시민 참여는 중요합니다”라는 당연한 선언이 아니라, 시민이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며 혁신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있다는 경험에서 나오는 확신이다. 정부의 지원이나 사회의 지지가 있고 없고와 무관하게 내 문제와 내 친구의 문제,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의 문제를 기술로 다뤄보려는 시민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독점 자본이 닫힌 기술로 다수의 시민 사회를 압도하는 시기, 그러나 여전히 300명 중 한두명만이 코딩을 할 줄 알기에 기술에 대한 허들이 높아지는 시기에 열린 기술로 사회의 디지털 공공재를 만들어내는 시민으로서의 개발자가 만들어내고 지켜내는 시민의 기술은 사회의 공공성을 확보하는데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정부가 ‘국민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고 디지털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기업이 ‘소비자를 위해’ 질 좋고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만들려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이란 지향을 넘어, ‘국민에 의한, 국민의’라는 지향을 향해야 한다. 국민을 민관협력의 대상이자 주요 문제 해결의 핵심 참여자로 바라볼 때에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국민을 디지털 전환의 핵심 당사자이자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주체로 바라볼때 ‘국민의’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중요한 정책에 활용하는 기술과 데이터를 개방하고, 시민들이 사회의 여러 인프라를 직접 들여다보고 개선하고 만들어낼 수 있도록 시민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안을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지금 우리는 함께 놓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 시민과 시민의 디지털 주권의 개념을 확립하고, 공익 목적의 데이터의 공적 소유 확대와 개방형 기술의 개발과 활용을 확대하며, 시민의 기술과 데이터 역량을 강화하고, 민관 협력 채널의 다변화 및 시민들이 제안하고 실험하는 정책 실험 공간을 확대하는 등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한 디지털 사회의 구축을 시민들이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시민의 디지털 주권에 기반한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
코로나19 공공데이터 공동대응은 공적 마스크 데이터 개방과 앱 개발을 마친 후에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코드포코리아로 다시 출발했다. 한국에서 기술을 가진 시민들, 우리 사회의 문제를 내가 가진 기술로 함께 해결해보려는 시민들이 한데 모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중학생이 청소년 정치 참여 확대 방안을 이야기하고,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모임을 주최하며, 직장인이 매일 매일 쓰레기를 줄이는 방안을 논의한다. 개발을 모르는 시민 누구나 쉽게 캠페인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엔지니어가 고민하고, 정부가 공개한 데이터나 개발한 웹사이트의 문제점을 찾아내 공무원에게 전달한다. 산업재해가 일어나는 사업장 정보를 확인하고 PDF로 공개되는 문서를 데이터로 공개해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PDF로부터 데이터를 읽어내 깃헙에 csv 형식으로 공개한다. 그리고 수기입장시에 개인 휴대전화번호가 노출되는 문제를 해결할 기술을 함께 찾아내자는 정부 제안을 받고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개발에 직접 나서기도 한다. 이제 곧 1년이 되는 코드포코리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평생 해야 할 놀이터 하나를 발견한 기분으로 즐겁게 참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민 기술의 확대가 우리가 맞이하게 될 디지털 사회가 더 민주적으로 움직이고,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한 디지털 공공재를 더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막연하지만 엄청난 예감과 함께 하고 있다.
2020년을 코로나19의 해가 아니라, 기술 혁신을 통해 풍요롭지만 지속가능하고, 자유롭지만 협력적인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한 한 해로 기억되게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시민이자, 개발자이자 전문가이기도 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시민 주도로 이뤄지는 디지털 전환의 조각 중 하나인 코드포코리아에 함께 만들어갈 시민들을 초대드리고 싶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더 많고, 더 나으며, 일상의 민주주의를 만들겠다는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의 2020년 한 해도 저물어 갑니다. 빠띠를 시작하던 무렵 “정치란 선출직을 뽑는 과정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며, 일상 속에서부터 민주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영역에서 필요한 신뢰와 협력의 기반 중 하나이며, 따라서 민주주의 플랫폼에는 다양한 디테일이 필요하다”는 빠띠의 이야기에 낯설어 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2020년에 빠띠와 함께 한 파트너 분들은 OOO(공론장,커뮤니티,캠페인,데이터 등등)을 하고 싶으니 빠띠와 함께 OOO을 해 보고 싶다고 이야길 먼저 꺼내십니다. 2020년을 시작하면서 공개했던 빠띠의 항해지도에 담은데로 디테일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과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커뮤니티, 캠페인, 공론장, 타운홀, 데이터를 중심으로 빠띠는 정신없이 한해를 보냈습니다.
돌이켜보면 올해 빠띠는 서울의 작은 도서관, 사회적 경제, 서울 및 경기도 이외에도 여러 지역의 구와 시와 함께 시민이 참여, 협력, 주도하는 공론장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크고 작은 토론회를 비롯하여, 총회, 더 나가 주민자치박람회도 더 즐겁고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함께 했고, 70년이 된 휴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바꾸자는 캠페인, 청소년 기후행동 주도의 캠페인, 사회적 경제 기본법 제정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비롯하여 시민사회단체나 시민들의 다양한 주장을 전달하는 캠페인을 함께 하였습니다. 성평등정책을 만드는 시민들의 워킹그룹, 청년기획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워킹그룹 등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만드는 사업도 꾸준히 진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활동들이 우리 사회를 더 많이, 더 나은, 그리고 일상적으로 민주적으로 만드는 중요하고 디테일한 일들입니다.
플랫폼 또한 한 해의 내부 테스트를 거쳐서 기존의 그룹스가 아카이브, 의사결정, 워킹그룹, 거버넌스에 최적화한 카누로 탈바꿈합니다. 올해 처음 선보인 믹스도 쉽고 빠르고 필요한만큼의 공론장 솔루션으로서 파트너들에게 제공되어 왔고, 내년엔 본격적으로 서비스화 하게 됩니다. 타운홀도 완전히 다른 디자인을 입어 한국의 정서에 맞는 실시간 토론 및 모임 플랫폼으로 곧 공개되며, 누구나 쉽게 바로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든 캠페인즈도 꾸준히 활용되고 개선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투게 시민이 주도하거나 협력하는 플랫폼의 뼈대 안에 공론장, 커뮤니티, 캠페인, 타운홀 등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신뢰와 협력의 기반으로 작동하는 여러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어 왔습니다. 올해 초에 보여드렸던 항해지도를 거의 따라온 것 같습니다. 이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해 그 사이에 빠띠의 크루도 20명으로 늘었습니다.
동시에 디지털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도 함께 진행을 했니다. 신뢰와 협력의 기술 기반을 만들거나, 민주적인 사회의 핵심 기반인 시민의 디지털 기술 주권과 모두에게 열린 기술이란 개념을 실현하기 위해 빠띠가 예전부터 관심을 두어 왔던 일들이 코로나19라는 위중한 상황 속에서 급작스럽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는 공적마스크 재고 데이터 개방과 공적마스크 앱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일입니다.
공적마스크앱 개발을 주도한 코로나19공공데이터 공동대응과 코드포코리아
2월말에서 3월초 사이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되던 시점에 마스크 품귀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직전에 빠띠의 데이터팀은 카드뉴스나 홈페이지에서 텍스트로 공개되던 정보를 긁어서 코로나맵 서비스를 제공하던 팀들에 연락해 정부가 직접적으로 코로나19 관련 데이터를 공공 데이터로 공개해 달라는 요청을 코로나19공공데이터 공동대응을 만들어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요청 중에 마스크를 비롯한 보호구가 품귀현상이 발생시에 정부가 만약 직접 배급하게 된다면 배급처 정보와 재고 정보도 API로 제공해 줄 것을, 그렇게 제공하게 되면 여러 시민 개발자들이나 기업이 해당 데이터를 활용해 다양한 형식의 앱을 만들어서, 정부가 직접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시민들에게 정보가 전달될 것이란 점도 담아서 요청을 하였습니다. 방역 당국의 선제적인 조치들을 칭찬하고 혜택만 보는 시민이 아니라, 방역 상황을 극복하는데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를 담아서요.
그때 마침 마스크 품귀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긴급하게 마스크 배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코로나19공공데이터 공동대응이 제안한 방식으로 데이터를 개방하고 민간이 앱을 개발하는 방식이 정부에서 진지하게 검토되었고, 한국정보화진흥원과 과기부,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복지부 등이 공적마스크 재고데이터를 개방하는 작업에 저희가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이후 빠띠를 비롯한 코로나19공공데이터 공동대응은 API의 설계와 테스트와 피드백에 참여하고, 실제로 개발을 진행할 개발자들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 모으고, 바로 개발에 착수할 수 있도록 가이드와 필요한 여러 지원들을 연결하는 작업을 5일 가량에 걸쳐서 진행하였습니다. 그 후 공적 마스크 제도가 시작된지 일주일이 안되어 시중의 마스크 재고 정보를 담은 앱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 이 모든 과정은 코드포코리아 위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불과 2-3일 사이에 정부와 함께 공적 마스크 재고 데이터를 제공하는 API를 만들고, 이를 활용하는데 필요한 가이드를 만들고, 200명이 넘는 시민 개발자(시빅해커)들이 각자의 앱을 만들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기술을 가진 시민들의 중요성, 정부는 환경과 문제, 자원을 제공하고 시민이 주도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방식의 민관협력의 가능성, 특히 판데믹과 같은 상황에서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어떻게 정부와 시민간의 신뢰를 높이고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공공 데이터와 기술이 열려 있을 때 얼마나 유용한지도 보았구요. 이는 시민의 디지털 기술 주권을 보장하고 모두가 활용 가능한 데이터를 확장하는 디지털 민주주의의 또 다른 지평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공공데이터공동대응은 이후 코드포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를 위해 기술을 활용하려는 시민 개발자(시빅해커)들의 네트워크로 발전 중이며, 또 다른 프로젝트들을 준비 중입니다.
디지털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우려사항들이 있습니다. 모욕과 욕설을 비롯한 인신공격과 신상공개, 부정확한 정보의 유통이나 나쁜 의도로 만든 조작된 정보, 단순 투표와 다수결 혹은 다수의 댓글로 결정을 내리는 형식적인 민주주의 등입니다. 디지털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 시민들의 신뢰가 필요함에도, 이러한 우려사항들은 쉽게 디지털 민주주의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고는 합니다. 빠띠는 민주주의에는 신뢰와 협력의 기반이 필수적이며,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지탱하는 기술들이 더 많이 연구되고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고, 개인이 안전하게 의견을 낼 수 있으며, 의견들은 합리적인 숙의 과정을 거쳐서 다수의 의견과 소수의 의견이 명확하게 파악될 수 있도록 돕는 기반 기술들은 앞으로도 많은 지원과 연구가 필요한 민주주의의 또다른 지평입니다.
디지털 민주주의의 또 다른 지평을 넓히기 위해 빠띠는 한국방송기자연합회, 피디협회, 기자협회와 함께 방송통신위원회의 인터넷 신뢰도 기반 형성 사업에 참여해서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 허위조작정보를 검증하는 ‘팩트체크넷‘을 지난 11월에 오픈하였습니다. 저널리즘에 입각한 사실 검증에 익숙한 기자들과 팩트체킹의 중요성을 공감하는 시민들이 팀을 이루어 인터넷 상에 떠도는 루머 중 주제를 택해 사실 관계를 확인해서 판단하는 플랫폼이란게 특징입니다. 또한 사실을 검증하는 과정이 플랫폼 상에서 공개되어 팩트체커가 아닌 시민들도 댓글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습니다. 내년엔 더욱 더 많은 시민들이 전문가로서, 시민팩트체커로서, 혹은 또 다른 역할로서 함께 팩트체킹을 해 나가는 플랫폼으로 발전시켜 나가며 크라우드소싱 방식의 팩트체킹 플랫폼으로서 한국에 자리잡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팩트체크 플랫폼은 신뢰와 협력의 기반으로서 더 나은 민주주의 또 다른 핵심이라고 빠띠는 여깁니다. 신뢰를 증진하고 협력의 바탕이 되는 기술들은 앞서 밝혔듯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기술 상태에서는 댓글수, 투표수로 중요한 사회적 의사결정을 하기에는 대표성을 비롯해 신뢰나 안전이 부족합니다. 또한 많은 개인들이 인터넷 상에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더욱 더 소수의 목소리가 증폭되게 만들고, 증폭된 주장은 침묵하는 다수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디지털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선 신뢰와 협력 기반을 만드는 여러 다양한 기술들이 연구되고 발전되어야만 합니다.
시민 주도로 문제를 설정하고 데이터 생성, 활용, 재생산까지 진행하는 ‘공익데이터실험실‘
빠띠는 올해 서울시로부터 색다른 공유기업 인증을 받았습니다. 바로 데이터 공유기업인데요. 데이터를 공공재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기업으로서 빠띠는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데이터를 생성하거나 활용 재생산하는 공익데이터 실험실을 운용하였습니다. 보통 정부가 가진 데이터를 시민들이 들여다보거나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 경우가 공공데이터입니다만, 정부의 데이터를 넘어서서 공공의 자금이 들여 만들어진 후 공개된 데이터나 민간에서 만든 데이터임에도 공공을 위해 제공되고 있는 데이터들을 묶어 공익데이터란 개념들로 확장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데이터를 중심으로 한 사회에서 누구나 접근 가능한 데이터가 늘어나는 것은, 프랜차이즈 커피숍보다는 공원이 늘어나는 것이나, 앞서 설명드린 코로나19 공공데이터처럼 사회 문제 해결에 시민들이 나설 수 있는 기반이 된다거나, 혹은 데이터가 있어야만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을 누구나 시작할 수 있도록 허들을 낮춰주는 것과 같습니다. 디지털 전환에서 데이터를 비롯한 디지털 공공재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직접 기술을 활용해 없는 데이터를 만들어 내고, 있는 데이터를 활용하고, 또 다른 데이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가진 시민들이 늘어나는 것이 앞으로의 디지털 사회가 더 민주적으로 자리잡는데 어쩌면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판데믹과 같은 상황에서 더 많은 주체들이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을 비롯해서, 플랫폼 사업자의 독점 상황을 개선하거나 투명하지 않은 정부의 의사결정에 대응하는데 시민들이 나서기 위해선 기술과 데이터에 대한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해서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작동합니다. 이를 시민의 디지털 기술 주권 혹은 데이터 주권이라고 부르며, 해외에서는 제도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져 왔습니다. 디지털 사회의 근간인 디지털 민주주의의 근간에는 이와 같은 디지털 주권을 보장하는 근간을 제도적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수적이며, 이 또한 디지털 민주주의 또다른 지평입니다.
이에 기반해서 빠띠는 올해 시민들과 함께 문제를 설정하고, 제공되고 있는 데이터를 활용하거나, 없으면 정보 공개를 통해 요청하거나, 직접 만들어 내고. 이후 해당 데이터를 다시 공공재로 제공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동들도 부모님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터 정보를 정리하거나, 내가 버린 쓰레기가 어디어디를 거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데이터로 확인하고, 코로나19 상황에서 무상급식이 필요한 이웃들이 어떻게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지 확인하거나, 지난 10년간의 스토킹 범죄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다거나 하는 일들을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 전문가들을 협력가로 모셔서 교육과 컨설팅을 병행하였구요. 또한 이외에도 시민들이나 시민사회단체가 주도적으로 다뤄온 데이터 프로젝트를 정해서 모으고 공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빠띠가 만든 데이터퍼블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더 많이, 더 나은, 일상의 민주주의를 확대하자는 생각으로 설립하였기에, 기본적으로 시민 주도로 혹은 시민과 협력하는 플랫폼을 만드는데 기획운영컨설팅을 하거나, 다양한 영역에서 신뢰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여러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드는 일을 빠띠는 해 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올해는 인터넷 상에 신뢰와 협력을 위한 기반 기술을 만드는 일, 시민의 디지털 기술 주권을 확대하고 실제로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영역을 넓히는 일들도 함께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로도 우리가 맞이하게 될 디지털 사회에 더 많이, 더 나은, 일상의 디지털 민주주의가 자리잡기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산업을 육성하고 인공지능 산업을 확장하는데 사회적 자원과 역량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행복한 디지털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 디지털 민주주의와 디지털 공공재 그리고 그 기반에 놓일 시민의 디지털 주권을 확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란 인식이 확산되고 여기에도 사회적 자원과 역량이 늘어날 수있을까요?
2021년에도 빠띠는 디지털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고, 그 안의 디테일들이 살아 숨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 한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년 2월 9일.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서울시청 근처로 두 공무원을 찾아갔습니다. 설 직후라 조용했던 서울시청 근처, 저는 그날 처음 본 분들에게 “담당 공무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요. 여러 필수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서 무리하지 않으시면 좋겠네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올해 말까지 시범사업을 끌어온 ‘민주주의 서울’의 첫 미팅 자리였습니다.
대통령 탄핵 정국이었던 그 당시 빠띠가 해 왔던 사업이나 빠띠가 만났던 사람들은 대체로 “시민이 자발적으로 자기 조직화를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입장과 “누군가 시민을 불러모아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미묘하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빠띠는 ‘시민의 자기 조직화’에 집중하며 우주당을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빠띠가 직접 하는 사업과는 별개로 우리가 만나는 분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생각이 실현되는데 필요한 게 무언지 고민해 주고 함께 답을 찾아보는 일도 자주 하고 있었죠. 그러나 탄핵 정국에서 기관의 민주주의 플랫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하는 팀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전에도 몇 년간 서울시의 다른 담당자들을 서너 차례 만나긴 했었습니다. 처음엔 ‘천만상상 오아시스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였고, 이후엔 ‘디사이드 마드리드 같은 것을 서울시에 도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였어요. 아래에 나눌 이야기를 똑같이 해드렸지만, 이야기한 내용 중 부분부분만이 떠돌다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운영팀을 구성하고 운영팀이 “애자일 방식이나 MVP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애자일”이 한동안 서울시 내에 회자되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설 직후 미팅에서 만났던 분들은 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된 분들로, 실제로 그 업무를 직접 다루고 있는 분들이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상명하달로 주어진 업무여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맡게 될 업무를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시로 옮겨온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아직 발령을 기다리는 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한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늘 하던 답, 지난 몇 년간 제가 서울시 다른 담당자들에게 말씀드렸던 이야기를 우선 그대로 해드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직 온라인상에서든 오프라인상에서든 시민들의 단순 제안이나 청원을 넘어, 참여와 토론, 권한을 어떻게 위임할지 연구가 많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 답을 함께 찾아가는 팀을 만들고, 그 팀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팀의 구성원은 외부 전문가와 내부 공무원이 섞여 있는 게 좋고, 외부 전문가는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나오는 디지털 플랫폼은 반드시 최대한 간단해야 합니다. 고민과 노력이 깊을수록 플랫폼이 간단해지는 것이지, 간단한 걸 따라 만든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 플랫폼이든 시민참여플랫폼이든 이 플랫폼을 통해서 어떤 효용이 있을지를 시민들이 믿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플랫폼의 최고 책임자가 정무적인 역량과 동시에 시 내부 체계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합니다. 그 권한은 상징적이어도 괜찮지만, 필요할 때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통은 시장 주도로 하거나, 부시장이 주도하거나, 혹은 시장이 외부 전문가에게 1번의 조직을 만들며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어떤 플랫폼이나 정책이든 초반에 열광하며 믿고 참여하는 시민이 필요합니다. 물론 새로운 일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만드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큰 기업에서도 막대한 비용을 들이지만 이 일에 애를 먹는 게 대부분입니다. 초기에 선출직 리더를 지지하는 기반이 탄탄하다면 이 기반을 활용해서 시민과의 소통, 협력을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입장이 강화되더라도 그 부작용을 관리하면서 나가는 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니 현재 시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또 얼마나 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수 조건입니다.
요약하면 1) 전문성을 가지고 답을 찾아갈 권한을 위임받은 운영팀, 2) 팀을 이끌거나 혹은 단단하게 지원해 주는 권한을 가진 책임자, 그리고 3) 초기에 시정을 지지해주는 시민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서 사실 세 번째만 있어도 초기 흥행은 성공합니다만,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없으면 2년 안에 실질적인 변화가 없다며 지지자들이 실망하며 돌아섭니다. 그 틈을 타서 정치적 입장이 다른 진영에서 정책이 소용이 없다거나, 무책임하다거나, 부작용이 심하다는 공격이 들어오게 된다고도 말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플랫폼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게 여러 가지 더 있지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성공합니다”라는 정답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기관이라면, 위의 세 가지가 갖추어져 있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해 보라고 권합니다. 한국에서는 공무원과 전문가를 섞은 팀을 만드는 방식도 경직되어 있어서, 지금은 1번의 운영팀을 내부의 의지를 가진 담당 공무원들과 외부의 전문가팀, 두 개로 나누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탄핵 정국, 그리고 박 시장님의 임기가 1년 남짓 남은 상태에서 서울시에 갓 배정받은 두 공무원, 거의 다 망가진 상태였던 천만상상 오아시스, 여기에 갑자기 높아진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기대감이 무색하게 실험도 고민도 해 본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거의 없는 상황까지.
여러 가지 넘어야 할 조건을 논의하고 난 후 “너무 고생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의 권한 밖에서 준비되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요”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끝이 났다면 지금 민주주의 서울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 후 얼마 뒤에 저는 다시 연락을 받게 되고, 그로부터 다시 반년 뒤 ‘민주주의 서울’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함께 만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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