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3. 평화

  • 디지털 기술과 시간을 통해 만드는 미래복지.

    각자도생 시대, 서로 돌보는 사회를 위해.

    [프레시안]과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2025년 8월 26일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 사회는 눈부신 산업화와 정보화를 이룩했지만, 그 이면을 살아가는 개인들은 무한경쟁 속에서 각자도생하고 있다. 이러한 각자도생의 분위기는 개인의 고립을 심화시키며, 경쟁과 고립의 압박은 때로 자신보다 약한 타인을 향한 혐오나 사회 전체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성장하는 극단주의와 각자도생은 우리 사회에 불신과 갈등을 키우고, 수많은 이를 소외시키며,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내몰고 있다.

    한편 2024년 겨울, 광장을 가득 채웠던 목소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인 동시에 서로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기도 했다. 동시에 진정한 존중과 포용이 서로에 대한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현장이었다. 지금 우리에겐 이 갈망과 증거를 바탕으로 일상에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연대와 존중을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천 중 하나로 사람과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타임뱅크(Time Bank)’가 있다.

    디지털 기술과 타임뱅크 플랫폼

    타임뱅크는 ‘모든 사람의 시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한 개인이 타인을 위해 1시간의 서비스를 제공하면, 미래에 자신이 필요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1시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이는 일방적 자선이 아닌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이러한 경험이 축적될수록 개인 간의 신뢰가 쌓이고 사회적 연대는 자연스럽게 강화된다. 결국 타임뱅크는 단순한 서비스 교환을 넘어 서로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타임뱅크 개념은 1980년대에 처음 등장했으나,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과 함께 그 잠재력이 본격화되었다. 과거의 수기 장부나 전화 연락 방식은 정교한 디지털 기술로 전환되어 서비스의 연결 과정과 관리 과정이 훨씬 편리해졌다.

    대표적인 글로벌 소프트웨어인 ‘아워월드(hOurworld)’는 전 세계 지역 공동체들이 자체 타임뱅크를 쉽게 구축하고 운영하도록 지원하는 소프트웨어이자 협동조합이다. 이 웹 기반 플랫폼은 회원 관리, 서비스 목록 관리, 시간 기록 및 정산, 회원 간 소통 등 타임뱅크 운영에 필요한 핵심 기능을 제공한다.

    또 다른 플랫폼 ‘타임리퍼블릭(TimeRepublik)’은 소셜 미디어 요소를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페이스북과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사용자들이 자신의 재능과 활동을 공유하고 소통하며 자연스럽게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국내 타임뱅크 플랫폼의 시도와 발전

    국내에서도 주로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한국의 특성에 맞는 타임뱅크가 시도되었다. ‘서울시간은행’은 서울시가 주도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시간 나눔을 목표로 했다. 온라인 플랫폼으로 활동을 관리하고 정기적인 오프라인 모임으로 유대감 강화를 도모했다. 현재 공식 운영은 중단되었지만, 그 취지는 각 자치구의 자원봉사 연계 사업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타임뱅크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타임뱅크코리아는 ‘타임클라우드’라는 앱을 만들었다. ‘타임클라우드’는 위치 기반 서비스(LBS)를 활용해 주변 이웃과 실시간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기능을 제공했으며, 상호 평점 및 후기, 본인인증 등 서비스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를 도입하기도 했다.

    국민대학교는 지역 커뮤니티와 협력하여 ‘타임페이(Timepey)’ 앱을 개발했다. 이는 대학생의 기술 재능과 지역사회의 필요를 결합한 상생 모델로, 학생들이 직접 앱 개발과 운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타임뱅크에 접목하려는 논의도 활발하다. 블록체인의 분산 원장 기술은 모든 시간 거래 기록을 위·변조가 불가능하도록 투명하게 관리하여 시스템의 신뢰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또한 중앙 관리자 없이 개인 간(P2P)에 시간을 교환하는 탈중앙화 모델 구현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타임뱅크는 현대 기술과 결합하며 끊임없이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타임뱅크

    타임뱅크 모델이 사회 전반으로 확장된다면, 모든 개인이 금융 계좌처럼 타임뱅크 계좌를 보유하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서로가 주고 받은 도움은 화폐 자본만큼 중요한 사회적 자산으로 인정받는다. 서로를 대등하게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도움을 주고 받은 경험이 개인의 사회적 자산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회로 우리는 향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한 개인이 이룬 삶의 성취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대와 도움, 그리고 선조들이 일궈낸 다양한 사회 인프라 위에서 가능하다. 이런 사실을 직접 경험한 개인들이 이웃과 사회에 책임감을 가지고 손을 내밀 때 우리는 그들을 시민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시민을 길러내고, 존중과 연대의 공동체를 향한 다양한 경제사회적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순간이다. 극단주의와 각자도생을 넘어,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에 나서자. 그리고 타임뱅크가 중요한 실천이 될 수 있다.

  • K-민주주의를 주창하는 한국에서도 디지털 시대에 맞는 민주주의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인터넷 기술이 등장하던 초기와 달리, 개방과 연결의 기술이 민주주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인식들이 요즘은 적지 않습니다. AI의 등장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전망들도 많습니다. 이에 민주주의를 지키거나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드는 기술과 시민이 주도하는 시민 공간에 대한 중요성은 전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내는 연 평균 최소 27억 달러(3조 5천억)에 해당하는 자선 기금이 있다고 합니다. EU는 호라이즌 프로그램 등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민주주의 활동을 위한 R&D와 지원금을 제공합니다.

    1️⃣ 미국의 <Democracy Fund>가 작년초에 내놓은 리포트에 따르면…

    + 민주주의를 위한 기관 자선 활동은 2017-2018년 38억~43억 달러 (연평균 19억~21억 달러) 에서 2021~2022년 54억~69억 달러 (연평균 27억~34억 달러)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이러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관련 기금은 다른 사안에 비해 여전히 미미합니다. 연간 34억 달러라는 높은 추정치는 2022년 미국 “전체 자선 기금의 0.7%에 불과”할 것입니다.

    + 기금에 해당하는 분류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투표와 선거) 투표권, 유권자 교육 및 참여, 선거 행정, 선거 자금, 재구획
    • (포용, 형평성, 정의) 사회적 및 인종적 정의, 사회적 응집력과 양극화, 정치적 폭력과 증오 방지
    • (시민 교육 및 참여) 시민 교육 및 리더십, 공공 및 이슈 기반 참여, 인구 조사
    • (정부 효율성과 민주주의 보호) 시민권/자유와 법치주의, 정부 감독 및 개혁
    • (미디어 및 정보 생태계) 저널리즘, 미디어 정책 및 잘못된 정보/허위 정보

    2️⃣ 유럽의 민주주의 프로젝트들은 여러 지원을 받지만 특히 EU 차원의 지원을 활용하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세계적인 민주주의 열풍이 불던 2017년 무렵 마드리드에 가 보니 한국에 알려진 프로젝트들 상당수가 EU 호라이즌 프로그램을 통해 R&D 자금을 이미 수년간 확보하고 1차 마무리 단계에 들어 가 있었습니다.

    + 호라이즌 유럽은 EU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 지원 프로그램으로, 7년 단위로 예산이 배정됩니다. 차기(2027~2034년) 지원 예산금은 현재(2021~2027년)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1750억 유로, 약 244조 원)라고 합니다.
    + 두번째 기둥인 “글로벌 도전과 산업 경쟁력” 내의 “문화, 창의성, 포용적 사회” 클러스터의 첫번째 주제가 민주주의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분야는 다음과 같습니다.

    • (민주적 회복력 강화) 정치적 양극화, 포퓰리즘, 급진주의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분석하고,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정책 도구와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 (미디어 자유 및 다원주의)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하고, 허위 정보(disinformation)와 외세의 정보 조작에 대응하는 연구를 지원합니다.
    • (시민 참여 확대) 특히 젊은 세대의 민주적 절차 참여를 독려하고, 시민 참여가 더 효과적으로 정책 결정에 반영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합니다.
    •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 디지털 기술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긍정적, 부정적)을 연구하고, 기술을 활용해 민주적 거버넌스를 개선하는 방안을 찾습니다.
    • (법치주의와 거버넌스) 법치주의에 기반한 제도와 정책의 투명성, 효율성,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를 진행합니다.

    3️⃣ 미국이든 EU든 디지털 시대가 가속화됨에 따라 기존 민주주의 활동 외의 여러 활동들이 추가로 강조되고 있는게 특징이라고 합니다.
    양극화와 급진주의에 대한 대응, 미디어와 정보 생태계 보호, 혐오와 허위정보등에 대한 대응들이 주요하고 동시에 시민 참여를 확대하고 기술을 활용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데도 투자합니다. 관련 법제도 개선도 포함해서요.

    4️⃣ 민주주의 인프라는 우리가 함께 모여 사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가장 기본 조건 입니다. 식량을 공급하는 농업이나 에너지를 공급하는 발전소, 도로나 지하철 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주 적은 관심과 투자가 일어나는 소셜 섹터입니다. 사실 EU처럼 정부 기관이, 미국처럼 민간 재단들이 투자하는 지역은 전세계적으로 거의 없습니다. 생각보다 민주주의 국가가 많지 않기도 합니다, 아시아는 더더욱이요.

    반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에 투자 할려면 할 수 있는 자금 및 기술 여건과 함께,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과 기대는 높습니다. 지금까지는 분단과 정치 양극화라는 제약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지만, 한국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민주주의 생태계를 만들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마주하고 있는 극단주의와 각자도생을 극복하고, 디지털 기술을 충분히 활용해 한국의 특징을 담은 민주주의 생태계를 만들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른 국가의 시민들과 나눌 수 있게 될까요? 저는 충분히 가능한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필요성과 가급성에 관심을 가지고, 현재 조성 중인 국가 R&D와 민간 차원의 기금에서 재원을 마련하기 시작한다면요.

  • 적정 디지털 전환 생태계 조성을 위한 공동선언문

    :  사회연대경제의 작고 유연하며 적정한 디지털 전환을 위하여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효율과 성장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회연대경제 조직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이자, 시민의 권한을 확장하는 공공의 자산으로 바라봅니다. 또한 우리는 디지털 기술을 공동체가 가진 가치와 원칙, 생태적 한계 속에서 활용해야 함을 믿습니다. 이에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시민사회와 사회연대경제조직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며, 보다 적정하고, 지속가능하며, 사람을 중심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며 상호협력할 것을 선언합니다.

    1️⃣ 하나 : 적정 디지털 기술의 지향

    우리는 시민사회와 사회연대경제 주체들이 기술의 객체가 아니라, 기술을 스스로 선택하고 활용하는 주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를 위해 디지털 기술은 크고 복잡하기보다는. <작고 유연하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공동체의 가치와 원칙, 생태적 한계 속에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둘 : 창조적 소통과 함께 성장

    적정 디지털 기술은 이용자와 개발자 간 창조적인 소통 속에서 완성됩니다. 적정 디지털 기술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현장과 삶의 질문들 속에서 자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용 주체와 소통>하기를 노력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적정 디지털 기술을 함께 탐색하고, 연구하며 실험하고자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더 나은 기술을 축적하고, 우리 자신 또한 <함께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3️⃣ 셋 : 기술과 사람, 공동체의 조화

    기술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활용할 수 있지만, 그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거나,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그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협력, 해석과 실행의 역량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정 디지털 기술을 통해 파괴적 혁신이 아닌, <정의로운 전환>, <조화로운 전환>이 되도록, 기술을 만들고 활용하는 이들의 인문사회적 성찰, 사유체계를 함께 고민하고 구축해 나갈 것입니다. 

    4️⃣ 넷 : 함께 만드는 민주적이고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

    적정 디지털 기술은 정치적 억압, 사회문화적 배제, 그리고 기술을 독점하는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포용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들과 더 많이 연결되고, 더 깊이 연대하며, 더 민주적이고 회복력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상상과 사유가 멈추지 않도록,적정 디지털 기술의 철학과 실천에 공감하는 주체들과 만남과 <협력의 장>을 계속 확장하고, 더 나은 사회와 기술을 새롭게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미래세대>를 발굴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의 이 공동선언은 우리가 지향하는 디지털 시민사회와 사회연대경제의 미래상에 대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 여정을 함께 걸으며, 적정 디지털 기술과 따뜻한 관계로 이어진 풍요롭고 지속가능한 세상을 함께 상상하고 실현하겠습니다.

    📌이러한 전환의 흐름이 더욱 힘을 얻기 위해서는 당신의 지지와 응원이 필요합니다.

    🙌 이 캠페인에 참여해
    “적정한 디지털 전환 생태계를 만드는 생태계를 지지하고, 선언에 동참합니다”
    라는 뜻을 함께 모아주세요.

    https://campaigns.do/campaigns/1636


    최신 기술을 모두가 꼭 도입해야 할까요? 기술 혁신은 언제나 사회의 규제와 부딪히기만 할까요? 세상이 가진 생태적 한계를 이후에 이룰꺼라 믿는 기술 혁신의 과제로 넘겨야 할까요?

    지난주 금요일에 사회연대경제에서 웹에이전시 작업 및 협동조합 지원 역할을 하는 기관 9군데와 빠띠 UFOfactory가 업무협약을 1차로 맺었습니다. MOU를 신청해주신 여러 기관들과도 추가로 맺을 예정인데요.

    함께 사회연대경제의 적정 디지털 전환 생태계를 만들어나가기로 약속했습니다. AI 전환이 중요한 시대라곤 하지만 사회 대부분의 조직들은 기본적인 디지털 전환조차 못 이룬 곳이 많은 상황입니다. 아마도 디지털 전환이 너무 크고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곤 하는데요.

    홈페이지를 만들고, 공동으로 작업할 온라인 공간을 만들고, 이메일과 SNS를 관리하고, 이해관계자의 정보를 관리하고, 우리만의 데이터도 구축하는 등. 기본적인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많은 작은 조직들에겐 이는 여전히 커다란 장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장벽을 넘어야 AI도 적용할 수 있음에도 말이죠.

    누구나 할 수 있는 디지털 전환이면서, 조직과 사회와 생태에 적정한 수준의 디지털 전환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게 <사회연대경제다움>이란 생각으로 함께 공동선언문도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술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이면서, 시민 권리를 확장하는 공동 자산으로 기능하도록 사회연대경제의 디지털 플레이어들이 역할하도록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 멋진 시민들이 만들 일상의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들은 더욱 고립되고 무관심과 각자도생이라는 생존 전략에 갇히게 된다. 결국 사회는 혐오와 갈등, 불신과 분열에 물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희망은커녕, 당장 생존 경쟁이 모두의 일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이 글은 생태환경문화잡지 <작은것이아름답다> 284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해 왔는가

    응원봉을 쥔 시민들이 다시금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군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들었던 화염봉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촛불로, 그리고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다채로운 빛의 향연을 선보이는 응원봉이 되기까지. 시민들의 손에 들린 상징물은 그 시대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자 지향점을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세상이 빛과 어둠에서 빛의 향연으로 바뀌었음을, 모든 것을 압도할 만한 연대가 폭력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켜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0년 전에 대학을 다닌 뒤 평생을 한국 사회의 엘리트로 살아온 어떤 이들에게 법과 제도란 한낱 자신들 이익을 지켜주는 도구일 뿐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나고 자란 시민들에게 법과 제도와 민주주의는 당연히 따르고 지켜야 할 규범이자 상식이었다. 청년들로 구성된 군대가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소극 대응한 이유는 그들에겐 그게 상식이자 정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갈라치기와 낙인찍기에 시달리면서도 탄핵 이전부터 우리 사회에 포용과 공정을 요구해왔던 청년들은 광장의 맨 앞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연대 의식을 표현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치는 성소수자,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 노동 현장의 노동자, 농촌을 지키는 농민들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은 함께 다양한 현장을 함께 오가며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즉 다양성과 포용, 연대와 협력, 상식과 정의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는 함께 지켜야 할 우리의 정체성이자 광장에서 살아 숨 쉬며 실체로 살아났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이러한 시민들의 상식과 열망과 달리, 지난 정부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들은 출범하자마자 사회 구성원들을 ‘낙인’을 찍고 ‘갈라치기’했다. 장애인의 이동권 요구, 청년들의 성평등 실천,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활동을 ‘반사회 활동’으로 규정하고, 지원을 끊고, 감사와 고발로 압박했다. 

    대통령을 풍자한 고등학생의 그림이 수상하자 담당자는 문책을 받았고, 대통령을 비판한 기자와 언론사는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됐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의대 정원 정책에 대한 현장의 비판에는 실제로 입을 틀어막고 내쫓아버리는 ‘입틀막’으로 대응했다. 선거에서 국회 다수당 구성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이 선출한 국회마저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고 무시하더니 드디어 ‘처단’에 나섰다.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출범한 정권은 결국, 자신들과 그 지지자들의 자유와 권리만을 지키려 했다. ‘낙인찍기’는 ‘혐오’를 낳았고, ‘갈라치기’는 ‘배제’를 낳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입틀막’이라는 ‘억압’을 거쳐, 마침내 친위 쿠데타를 통한 실제 ‘처단’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공권력은 그들을 지키는 방패이자 칼이었고, 법과 제도도 마음대로 비틀 수 있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

    매우 위태롭게도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한국 사회는 이미 복합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기후 위기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고, 국제 정세는 불안정하며,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중소상공인의 줄도산은 코로나19 시기보다 더 심각하고, 지역 소멸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노동과 교육, 산업에 큰 충격을 예견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사회적 준비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들은 더욱 고립되고 무관심과 각자도생이라는 생존 전략에 갇히게 된다. 그 결과 사회는 혐오와 갈등, 불신과 분열에 물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커녕, 당장 생존 경쟁이 모두의 일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멋진 시민들의 탄생

    우리는 언제 ‘시민’이 되는가?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에 몰입하는 개인이, 사회적 책임과 연대 의식 을 가진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은 언제일까?

    복합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협이 교차하던 시기, 군인들이 국회 앞에 등장하자 시민들은 곧바로 국회 앞으로 달려갔다. 저마다 자리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시민들은 분노와 염려를 나눴고, 시민의 힘이 모여 마침내 헌정 질서를 지키는 역사를 이뤄냈다. 그 과정을 통해 많은 시민들은 스스로 한 개인이 거대한 공동체에 기여하는 효능감을 확인했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 서로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진 시민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그리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만들어낸 힘은 곧 연대의 힘이다. 사회에서 모든 개개인 힘만으로 완전한 안전을 확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나를 향한 존중과 연대를 경험하며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며, 나아가 그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다. 서로 존중하는 공간이자 연대의 공간인 광장에서 시민들은 공동체 일원으로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100여 일에 걸친 시간 동안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에서 ‘멋진 시민’으로 태어났다. 시민 개인의 효능감과 서로를 잇는 효능감을 통해 공동체의 효능감을 느끼고,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감과 소속감을 가진 시민은 그 존재 자체가 마치 응원봉의 빛처럼 우리 사회를 희망으로 이끌 존재들이다. 이 시민들 한명 한명이 우리 사회가 문제 해결 능력을 회복하고, 모두를 위한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더 많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꿈꾸는 법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광장에서 함께 만들어낸 변화의 열망과 성과는 이제 일상에서 실천할 과제가 됐다. 민주주의는 시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족, 학교, 직장, 마을을 비롯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연대하며, 상식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상의 실천 속에서 구현된다. 

    광장에서 드러난 시민의 열망은 단순한 권력 구조의 개편이 아니라, 다양성과 포용, 연대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실제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였다. 이 요구를 실천하기 위해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목소리를 모으고, 대화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지금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 경제 불평등, 사회적 갈등 같은 복합 위기는 모두가 저마다 삶에서 체감하고 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조건을 가진 시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함께 그 문제들에 대한 공동체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은 행정과 의회를 넘어 시민에게 더욱 분산돼야 한다. 2017년 촛불 뒤 잠시 열렸던 시민 참여, 협치, 자치의 공간은 다시 열리고 확장돼야 하며, 실제 정책과 사업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제도화돼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 시민사회가 함께 만드는 지속가능한 협력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 주권이 선거와 시위와 같은 일회성 참여에서만 실현되지 않도록 다양한 제도 도입도 필요하다. 국민 발안제, 국민 소환제, 국민 투표제 같은 다양한 민주주의 장치는 여전히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 시민의회나 디지털 시민참여 플랫폼 같은 여러 방식을 통해 시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실제로 참여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더 나아가 시민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기업과 기술에 대해서도 시민의 권리가 확보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 한 사람이자 유권자로서 권리가 확장되는 만큼, 소비자 권리, 노동자 권리, 주주의 권리, 글로벌 기술 혁신에 깊은 영향을 받는 디지털 사회의 시민 권리가 필요하다. 이는 기존에 존재하는 기업이나 기술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대안들을 지속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대안이 없으면 시민의 권리는 제대로 발휘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의 미디어 환경은 오히려 극한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며 민주주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알고리즘에 왜곡된 여론은 혐오와 갈등을 확대하고,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시민들이 함께 모여 안전하게 이야기하고, 다름을 존중하며, 공동 해법을 찾는 디지털 시민 공간이 전무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에겐 ‘일상의 디지털 시민 광장’이 절실하다.

    혐오와 여론 조작에 취약한 플랫폼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안전한 대화의 환경, 협력의 기반을 제공하는 디지털 공론장이 마련돼야 한다. 이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은 시민의 연결과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 자산이며, 기술과 제도에 대한 공공성과 책임성을 스스로 강하게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 역시 비영리 기관이나 사회적 경제 주체들이 운영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수 있다.

    일상의 민주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기술을 활용해 우리는 광장에서 꿈꿨던 ‘더 많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일상에서 실현할 수 있다. 갈등이 혐오와 낙인,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연대하고, 상식과 정의를 지키며,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하고 포용하며 협력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복합 위기를 모두를 위한 방식으로 함께 해결하며, 결국 모두가 함께 살고 싶은 공동체를 시민의 힘으로 만들 것이다.

    다시 민주주의 배우고 가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 공동체는 도전 받고 있다. 권위주의, 극단주의, 갈등과 혐오가 공동체를 흔들고 있으며,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경제 위기와 국가 간 갈등, 심지어 기술 혁신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초고속 인터넷망을 전국에 설치하며, 이 지구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 민주주의, 문화적 풍요를 이뤄냈다. 국민들이 만들어낸 성취와 공식은 세계에서 부러움을 사며 따라야 할 모델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성공의 공식들이 지금은 우리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전체를 사막으로 만들고 있다. 사회, 경제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갈등과 혐오는 불신을 넘어 부정적 감정을 동반한 존재의 부정으로 발전했으며,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재난과 재해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출산율과 자살률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실을, 반복되고 악화되는 사회적인 재난과 자연재해는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를 착취하는 현실을 반증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한번 더 많은 발전과 더 새로운 기술이 이 상황을 해결하리라 여기고 기존의 공식을 더 강화해 인간 스스로의 생태적 한계를 비롯해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생태계의 한계를 무시하고 있다. 더 효율성 있는 발전을 위해 더 뛰어난 소수의 무리가 기술을 활용해 사회를 이끄는 것이 상황을 해결하리라고 믿고 실행에 나서기도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공지능(AI)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국가가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더 희귀한 자원을 추출하고, 더 많은 물과 전기를 생산하고 소비하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며 현재의 문제를 악화하는 상황은 단기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관점도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만들어낸 공식으로 현재의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는 한계를 자각하고 존중하는 개인들이,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존재들의 가치와 상황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함께 연대하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며 민주주의와 생태주의 관점에서 문제를 다뤄야 한다. 이는 위기 극복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사회를 연대와 안전, 신뢰와 협력, 풍요와 지속가능성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확립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행히 우리는 이미 여러 위기를 함께 극복해 왔다. 한국 사회는 시민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렸고, 촛불로 정의를 세웠으며, 응원봉으로 미래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시민들의 힘으로 역사를 만들 수 있음을, 목소리를 모으고 서로 연대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음을 우리는 함께 경험했다. 

    우리는 다시 전환점에 섰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공동체를 다시 구성해야 할 시기다. 희망은 우리가 나누는 일상의 대화 속에, 사소한 연대와 실천 속에 스며들어 있다. 멋진 민주주의는 멋진 시민들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진정으로 ‘멋진 민주주의’를 만들 멋진 순간을 잡았다.


    권오현 – 디지털 시민 광장 빠띠의 대표와 시빅해킹커뮤니티 코드포코리아의 오거나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연결하고 협력하는 디지털 기술과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 공공재, 평화에 기여하는 플랫폼과 컬렉티브를 만든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자유롭고 행복한 개인들이,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풍요롭고 지속가능한 공동체와 평화로운 삶과 세상을 꿈꾼다.

  • 낙인과 갈라치기, 입틀막과 처단으로부터 — 존중, 포용, 연대로 지켜낸 민주주의

    2024년 12월 3일, 국회 의사당을 보여주는 생중계 화면에 총칼을 든 군인의 모습이 등장했을때, 많은 시민들은 그 총이 곧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실질적인 공포를 느꼈다. 실제로 계엄군이 발표한 포고령에는 ‘처단’이라는 단어가 뚜렷이 박혀 있었다.

    이 정권이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전조가 있었다. 40년 전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들인 것처럼, 그들은 출범하자마자 끊임없이 사회 구성원들을 낙인을 찍고 갈라치기 했다. 이동권을 요구한 장애인들, 성평등을 실행하는 청년들, 시민사회와 노동계, 사회적경제 영역을 ‘이기적인 집단’이거나 사회를 전복하려는 ‘반사회적 세력’으로 일치감치 규정했고, 지원을 끊고, 감사와 고발로 압박했다. 대통령을 풍자한 고등학생의 그림이 수상하자 담당자는 경고를 받아야 했고, 대통령을 비판한 기자와 언론사는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시켰다. R&D 예산 삭감과 의대 정원 정책에 대한 현장의 비판에는 ‘입틀막’으로 대응했다. 선거에서 국회 다수당 구성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이 선출한 국회마저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고 무시하더니 드디어 ‘처단’에 나섰다.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출범한 정권은 결국, 자신들과 그 지지자들의 자유와 권리만을 지키려 했다. 낙인찍기는 혐오를 낳았고, 갈라치기는 배제를 낳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입틀막이라는 억압을 거쳐, 마침내 친위 쿠데타를 통한 적극적인 ‘처단’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에게 공권력은 그들을 지키는 방패이자 칼이었고, 법과 제도도 마음대로 비틀 수 있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

    그 폭력의 빌드업을 시민들이 최종적으로 막아냈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혐오에 맞서 연대하며, 법과 제도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존중하려는 집단적 의지로, 자유 민주주의의 본질을 지켜낸 시민들. 광장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연대가 필요한 순간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함께 하며 힘을 모아내며, 법이 정한 결정을 답답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순간들. 그 전에도 지난 3년간 소수자와 연대하고, 피해자와 연대하고, 내부고발자와 연대하던 순간들. 그 순간이야말로 존중, 포용, 연대의 가치가 낙인과 갈라치기와 폭력을 이겨냈고, 자유로운 구성원들이 공존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민주주의는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효율적인 체제가 아니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구성원들이 서로 공감 가능하고 수용 가능한 합의를 찾아가며 공동의 가치와 답을 세워나가는 시스템이다. 이를 위한 공통 기반이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지하며, 폭력을 동반한 억압에 함께 맞서는 자세다. 존중과 포용과 연대가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핵심 기반이다.

    다행히 이번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와 함께 그 반대의 행태를 실감했다. 낙인찍기, 갈라치기, 입틀막, 처단은 민주주의 사회가 용납할 수 없음을. 서로 다름을 견디고 존중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함께 지킬 때에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음을 말이다. 무엇보다도 누군가 목소리를 내는 구성원을 사회에서 반사회세력과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고 혐오와 폭력을 가하며,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와 주장과 이익만을 옹호하려할 때, 동료 시민으로서 함께 대응하는 연대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핵심임을.

    권력 앞에 자유 민주주의는 한낱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존중과 포용, 그리고 연대. 이 세 가지를 믿는 시민들이 있을 때 그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에게 실체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저들과는 다른 민주주의 사회의 진짜 주인임을 증명하는 힘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기회가 주어진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멋진 순간을 멋지게 돌파했는지 스스로를 잊지 않고, 함께 멋진 사회를 상상하는 대화와 협력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 공감과 존중을 외면한 채, 공감과 존중을 기대하기: 지브리풍 그림 열풍의 역설

    지브리풍의 AI 그림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사람들은 각자 간직하던 소중한 사진을 멋진 지브리풍 그림으로 변환한 후 자랑스럽게 공유한다. 아름다운 화풍에 담긴 자신의 모습,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 소중한 순간들을 공유하며 타인의 공감을 기대했을 것이다. 마치 관광지에서 역사 유산이나 자연 유산을 가린채 셀카를 찍는 이들이 그 유산이 아니라 ‘그 유산 앞에 선 나’를 기념하듯이, 사람들은 세상 속의 자신을 기념하고 그 순간의 자신에게 다른 이들이 공감하길 바란다. 지브리풍 AI 그림을 공유하는 열광 속에는 자기 존중과 타인의 공감에 대한 갈망이 있을 테다. 소셜 미디어가 그렇듯이.

    이 열풍에 관해 샘 알트만도 트윗을 남겼다. 자신도 지브리풍 그림을 프로필에 올린 그는, 10년간 암 치료 등을 위해 초지능을 만들려 노력했지만 7년은 무시당하고 2.5년은 미움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챗GPT로 지브리 스타일 그림을 만들며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다고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글에는 창작자로서 겪은 고통과 외로움, 암 치료보다 프로필 이미지에 열광하는 현실에 대한 복잡한 감정, 그리고 이런 현상을 만들어낸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그 역시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의 어려움을 겪었고, 존중과 공감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어 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한편 지브리 화풍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2016년 NHK 다큐멘터리에서 AI가 그린 결과물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AI가 그린 결과물은 실제 작업하는 사람의 고통을 전혀 모른다”, “역겹고 소름이 끼친다”, “삶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한 땀 한 땀 그림을 그리며 창작의 고통을 감내한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고, 역설적으로 ‘지브리풍’ 이미지에 자신을 담아내는 데 열광하는 대중을 만들어낼 만큼 커다란 존중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지브리풍 그림에 열광하면서도 오픈AI가 미야자키나 지브리의 동의를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이 전세계에서 미야자키가 ‘역겹다’고 말한 AI 그림을 그의 화풍을 모방해 만들고, 심지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쳤던 그의 화풍으로 이스라엘 군이 선전물을 만들기까지 했다. 열광의 근저에는 인간 누구나 가진 존중받고 공감받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그 한가운데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며 겪은 고통과 그 결과물에 대한 존중과 공감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공감과 존중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과 존중을 건너뛰고, 자신에 대한 공감과 존중만을 바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마음껏 하곤 하지만, 그 사이에 우리의 인간성이 망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해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던 작가들이 느낄 절망은 앞으로 인간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게 될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브리 화풍의 그림에 반대 의사를 밝힌다면, 법률 분쟁에 돌입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의사를 존중하고 지금까지 생성한 그림을 다 내리게 될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터뷰에서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진 것 같다. 인간은 자신감을 잃었다”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치 이런 시대가 올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AI의 시대에 “인간성은 무엇인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 것들은 무엇인지” 고민하며 “어떻게 살지” 우리에게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 디지털 민주주의가 우리의 멋진 미래가 되려면

    창비주간논평에 게재한 글입니다.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스펙트럼 안에서

    오늘날 디지털 혁신은 플랫폼을 통한 연결, 광범위한 데이터의 축적, AI를 통한 자동화를 기반으로 한다. 이런 기술들이 낳은 과잉 생산과 과잉 서비스, 과잉 개인정보 수집·분석이 마냥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디지털 시대에 왜 민주주의는 그대로인가’라는 질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답하기는 궁색해졌다.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연결과 축적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모든 시민이 목소리를 내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며, 때로는 직접 해결책을 찾아내고 실행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은 ‘디지털 민주주의’에 주목한다. 발안·숙의·결정 과정에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고 관련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대리자에게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던 정치와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 더 많은 시민들이 직접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시빅해커’(civic hacker)들은 해커들이 시스템을 해킹하듯이 공공데이터와 공공서비스를 필요에 맞게 고쳐 쓰거나 정부가 만들지 않는 시스템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스스로를 이같은 시빅해커로 부르는 시민들이 활동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시민들의 노력과 제도정치 및 정치인들의 노력이 만나 오늘날 디지털 민주주의는 다양하게 시도되고 발전하고 있다. 정책 제안과 청원, 예산 편성과정에서의 시민 참여가 생겨나고, 시민이 공론과 숙의로 정책 결정과정에 함께하는 민관협력이 늘어나며, 단순한 제안을 넘어 시민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거나 의제별·마을별로 활동을 펼치는 등 분권과 자치도 확대되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에 청원을 올려 공론장이 펼쳐지고 일정 인원 이상의 시민들이 동의하면 기관의 답변을 들을 수 있거나 의제가 채택되는 시스템은 불과 지난 10~20년 사이에 도입된 것이다. 필자를 비롯한 시빅해커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정부에 마스크 재고 데이터를 공개하도록 요구하고 이를 통해 공적 마스크 재고 확인 앱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처럼 사회문제를 민과 관이 함께 해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디지털 공론장을 시민의 디지털 공공재로

    현재 기술로도 국민의 정치적·정책적 선호도나 지지 여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시스템은 가능하다. 조례 및 법률, 헌법 개정안을 누구나 발의하고 공론장을 열어 충분한 동의를 얻으면 투표에 부칠 수도 있다. 나아가 환경정책은 A정당과 정치인을, 경제정책은 B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는 식으로 세분화된 지지도 가능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모든 정책 제안을 데이터베이스화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이미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추첨제 시민의회도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면 더 많은 시민이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논의에 참여할 수 있으며, 실시간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시민의 참여와 위임에 따른 보상체계를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이런 모든 가능한 일들을 단순 도입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저절로 개선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건강한 ‘시민공간’(civic space)이 존재할 때 가능하지만, 현재 한국의 디지털 공간은 극단적인 주장만 부각되는 구조다. 미디어학자 이창현은 ‘사회대개혁 국회연속세미나’(2025.2.27)에서 이를 ‘여론의 역(逆)정규분포’로 설명하며, 극단적 의견이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인식되고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왜곡현상을 지적했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미얀마의 인종청소 선동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엑스(구 트위터)의 알고리즘을 조정해 자신의 게시물이 천배 더 노출되도록 만들었다. 한국은 대통령이 유튜브 알고리즘의 늪에 빠져 계엄을 선포하는 데 이르렀다. 더 많은 조회수를 확보해 높은 수익을 올리려는 플랫폼과 특정 개인이 사유화한 플랫폼이 우리의 사유와 공론장을 장악한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 트래픽의 절반이 프로그램화된 봇(bot)에 의해 생성되는 시대가 되면서, 디지털 공간에서 접하는 콘텐츠와 참여의 상당수가 비인간이 만든 것이 되고 있다. 생성형 AI와 딥페이크 기술은 해외에서는 정치적 왜곡에, 국내에서는 성범죄에 악용되며 많은 사람이 온라인 공간에서 침묵하거나 떠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디지털 기술이 가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연결의 기술은 기존에 고립되었던 소수자들을 결집해 안전감과 힘을 부여했으며 더 다양한 주장과 근거가 서로 경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축적의 기술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특히 AI로 대표되는 자동화의 기술은 인류가 그 어느 시절에도 도달하지 못한 진정한 해방의 시대를 만들 가능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을 드러내 대화의 공간을 열어야 한다. 아직 주목받지 못한 소수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시민들에게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혐오와 차별, 허위 조작정보에 강력하게 대응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는 공론장을 만드는 일을 더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이는 그러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제도 및 기술 개발에 나서야만 실현할 수 있는 일이다.

    필자가 일하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서는 시민들이 대화하고 행동하는 디지털 광장을 만들고 있다. 디지털 시민광장에서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들이 용기 내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동시에 혐오와 차별에 대해선 강력하게 대응한다. 의도적으로 공론장에 다양성·공정성·포용성(DEI,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을 더 강화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시민들이 직접 허위정보를 판별하고 팩트체크 콘텐츠를 만들기도 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소와 함께 2년째 주관 중인 ‘한국의 대화’ 온·오프라인 프로그램도 공론장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을 좌우가 아니라 다양한 축과 그룹으로 분류하고, 그 안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모아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게 하여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취지에서 기획된 자리다. 시빅해킹 커뮤니티 ‘코드포코리아’(Code for Korea)의 설립으로 이어진 공적 마스크 앱 개발 사례처럼 시민들이 데이터를 활용해 다양한 사회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도 한다. 혐오와 갈등, 무관심과 각자도생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에도 존중과 포용, 협력과 신뢰를 믿는 시민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시민들을 모으고 연결하고, 대화하고 행동하는 디지털 광장을 만드는 게 디지털 민주주의의 목표다.

    연결하고 협력하는 시민의 힘

    경제와 글로벌 위기, 기후위기와 인구감소, 무엇보다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행복하지 않은 사회.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더욱 심각해져가는데, 극단적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정치세력과 미디어 시스템이 실제 현실까지도 왜곡하며 우리 사회의 신뢰 기반과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시대를 지켜보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는 정부, 정당, 정치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응원봉을 들며 광장에 나가고, 법률과 헌법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린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신뢰하기 때문일까? 아마 법률과 헌법 시스템이 우리 공동체의 최후 보루라는 절박함이 더 클 것이다. 경제가 어려우면 금붙이를 들고 나오고, 정치가 어려우면 촛불과 응원봉을 들고 나오는 ‘나라를 걱정하는 시민들’. 이런 평범한 시민들의 권한을 국가적 중대사를 비롯해 일상의 여러 사안들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썩 만족스럽진 않아도 현재 헌법이 그어놓은 테두리를 지키면서 시민들은 묻는다. 왜 당신들은 이 테두리를 지키지 않냐고, 왜 주권자인 국민에게 권한이 없냐고.

    권오현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이사장

    2025.3.18. ⓒ창비주간논평

  • 광장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현하자

    이 글은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마을정책이슈브리프에 게재한 글입니다.

    시위를 축제로 만들며 응원봉을 흔드는 시민들이, 군이 국회를 침탈하도록 지시하고도 이를 부정하거나 옹호하는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과 공존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독재에 맞서 들었던 화염병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촛불로, 그리고 다양성을 상징하는 응원봉으로 변화해 왔다. 권력자들은 1987년 확립된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부정하고 군사력으로 흔들려 하지만, 시민들은 정의를 넘어 포용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미래의 민주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추운 겨울, 광장에서 밤을 지새운 시민들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광장에서 표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지속되어야 하며, 더욱 중요한 과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권력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지역과 나누며 시민들에게 더 많은 참여와 통제의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시민들이 주기적으로 공동체가 위기에 닥쳤을때 광장에 모여 의사를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논의하고 실현하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마을에서 변화의 시작을

    그 변화의 출발점은 마을이다. 마을은 시민들이 자신의 생활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대화를 나누며,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정치뿐 아니라 경제, 국제, 기후 위기가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곳이기도 하다.

    경제 위기와 함께 자연 재해가 심각해지는 요즘, 1인 가구로 살아가는 청년과 노인들이 서로 돌볼 수 있는 곳도 마을이며, 줄줄이 폐업하는 자영업자들의 삶의 터전도 마을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경제 구조 속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고민하는 미래 세대 역시 마을에서 성장한다. 복합 위기가 일상을 압박하는 현실 속에서, 시민들은 삶과 죽음, 성장과 안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하는데, 그 해결은 마을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여러 마을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성북구의 초등학생들은 스스로 우유곽을 모아 재활용하는 캠페인을 벌이며, 구의원을 대상으로 관련 조례 제정을 요구해 답변을 받아냈다. 강북구와 광진구에서는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공론장을 열어 마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외의 여러 지역에서 탄핵 이후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하는 모임도 생겨나고 있다. 관악구에서는 청년들이 한 동네의 등기부등본을 모두 모아 공개 데이터로 정리했다. 다른 마을에서도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닐 수 있는 매장을 조사해 데이터로 만들거나, 침수 예방을 위한 빗물받이 점검 활동을 시민들이 스스로 펼치고 있다.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한 시민의회는 마을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지역 의원들과 협력해 시민들이 직접 마을의 주요 의제를 논의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미래 비전을 함께 수립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민 플랫폼을 활용하면, 바쁜 청년층도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다. 디지털 격차 문제를 걱정하는 시선도 있지만, 더 많은 참여를 촉진함으로써 일상의 민주주의를 확장할 수 있다.

    일상에서 다양성과 포용을 기반으로 한 실질적인 변화를

    변화는 비전과 해결책을 다수가 공유하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 2024년 광장에서 표출된 시민의 열망은 단순한 권력 구조 개편을 넘어, 다양성과 포용을 기반으로 한 실질적인 변화를 향하고 있다. 광장에서 모인 시민들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제 우리는 그 열망을 일상에서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마을에서 모여 목소리를 내고,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자.

    한편, 경제·사회·정치·국제·기후 위기의 최전선 또한 마을이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복합 위기가 현실이 된 지금, 해결책 역시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다양한 가족 구성원, 직업, 경제적 배경을 가진 시민들이 모인 마을에서부터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개개인의 각자도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공동체가 함께 대응해야 할 과제다. 

  •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열었다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화염병이 촛불로, 촛불이 응원봉으로 변하기까지 40년이 지났다. 격렬한 저항의 시대를 지나 평화로운 시위가 자리 잡았고, 이는 다양한 시민 참여로 발전했다. 이 모두가 시민이 만들어낸 성과이자 역사이다.

    6공화국의 과제와 한계 :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면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시민이 광장에서 계엄군을 설득하고 탄핵을 이뤄내는 광경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시민이 서로 따뜻한 커피와 식사를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온 이들을 위해 버스를 대절하며, K-팝 음악에 맞춰 춤추고 구호를 외치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광경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내재화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한 지도자들이 오랜 준비 끝에 추진한 계엄조차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만을 경험한 젊은 세대는 계엄 자체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공화국의 성적표는 실망스럽다. 6공화국의 대통령들 가운데 3명이 탄핵 소추를 당했고, 이 중 2명은 탄핵이 인용되었으며, 2명은 감옥에 갔다. 가족이 감옥에 간 사례도 2건이나 된다.

    군인, 정치인, 기업인, 변호사, 검사라는 대통령의 출신을 보면 우리 사회가 여전히 4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87년 이전을 살아온 정치, 경제, 관료 엘리트 집단 간 갈등은 진보와 보수라는 구도로 포장되어 국민을 갈라치지만, 이는 국민의 일상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제왕적 대통령의 자의적 권력 행사는 사회, 경제, 안보,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요인으로까지 증명되었다.

    시민 중심 민주주의로의 전환 : 시민의회

    민주주의의 여정에서 1987년에 독재자의 권력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게 넘어간 것은 커다란 변화이자 성취였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주의를 내재화한 국민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한 단계 더 발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2016년 첫 번째 탄핵의 상징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었다면, 2024년 두 번째 탄핵의 상징은 다채로운 응원봉이었다.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여러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힘을 믿고 다양성을 포용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제 국민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도화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행정과 의회의 권력은 시민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8년 전 촛불 시위 이후 잠시 열렸던 시민 참여와 협력의 공간을 다시 확대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정권 교체로 중단되었던 정부, 지자체, 마을, 시민사회 등 사회 곳곳에서 시민 공론장과 공론화, 시민 참여 플랫폼과 민관 협치의 장을 다시 열고 더욱 성숙시켜야 한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대화하는 단계를 넘어, 이를 정책과 사업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론화 사업과 같은 프로그램의 높은 비용과 형식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역 및 의제별로 상시 운영되는 시민의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구 구성을 반영해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 주요 현안과 미래 과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숙의하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시민의회는 다양한 방식과 기간으로 운영되며, 행정과 의회를 견제하고 협력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며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시민의회를 통해 공개하는 정보와 숙의를 통해 발견한 다양한 관점은 우리 사회를 더욱 성숙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더불어 계엄과 탄핵의 순간에 국민이 가졌던 의문을 해소해야 한다. 군인들이 국회의 창을 깨고 본회의장으로 난입한 순간 어떤 국민은 “왜 국민이 스스로 계엄을 해제할 수 없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본회의장에서 탄핵을 의결하려던 때 나타나지 않는 국민의힘 의원을 보며 “왜 국민은 저들에게만 의결을 맡겨야 하는가? 그리고 왜 국민의 뜻에 반하는 국회의원을 지켜만 봐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국회의 순간이 끝나고 헌재의 시간이 왔다고 모두가 이야기하던 순간에 “왜 헌재의 결정을 다시 기다려야 하며 국민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가?”라는 의문도 생긴다. 이 의문의 답도 우리는 다시 찾아야 한다.

    다채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과제

    또한, 사회를 분열시키는 플랫폼과 알고리즘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시민이 계엄을 막아내고 탄핵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을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인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첫 국가로 만들었다. 허위 정보와 혐오 발언을 확산하는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미얀마에서 소수민족의 대학살을 초래하기도 했다.

    혐오와 여론 조작에 취약한 플랫폼이 분노를 증폭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상황을 막으면서도, 시민이 서로 연결되어 협력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사회 현안에 대해 시민의 목소리를 모으고, 대화의 장을 여는 공간, 시민이 이슈를 모으고 팩트체크를 하며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안전한 대화가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는 안전하고 믿을 수 있고 영향력 있는 시민 광장으로서의 플랫폼이 절실하다.

    사회 통합을 위한 노력도 필수적이다. ‘국민’과 ‘비국민’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갈라치는 세력을 단호히 처단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대화하고 협력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가 직면한 사회, 경제, 국제, 기후 위기와 같은 거대한 문제는 시민의 참여와 협력 없이는 극복할 수 없다. 혐오와 갈등, 무관심과 각자도생을 극복하고, 신뢰와 협력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시민의 힘으로 우리 사회에 축적해야 한다.

    시민이 만드는 민주주의의 미래

    촛불이 흑백이라면, 응원봉은 다채롭다. 민주주의를 내재화하고 미래를 살아가는 시민의 열망 속에서, 우리는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기회를 맞이했다. 한편, 지금은 비인간과 결합한 신인류를 상상하는 기술 엘리트들의 세상을 막고, 존중과 포용, 신뢰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판가름하는 문명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이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응원봉을 든 시민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며, 동시에 시민 스스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 기회는 발전한 자본주의, 제도화된 민주주의, 자의적인 법치주의의 한계를 경험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시민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다. 연결하고 협력하는 시민이 나서서 멋진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자.

  • 2024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 나타난 빠띠 타운홀을 만나보세요

    세계 영화인에게 사랑받는 영화 축제인 부산국제영화제, 2023년에 이어 ‘2024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 관객프로그래머 선정 투표’도 빠띠 타운홀과 함께 했는데요. 올해에는 영화제 현장에서도 빠띠 타운홀을 활용했습니다.

    영화제는 단순한 영화 상영을 넘어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관객과의 소통을 강화했는데요. 약 30여 개의 프로그램별로 빠띠 타운홀을 활용해 감독, 배우에게 질문을 남기거나, 만족도 조사등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코로나19 이후 가장 성공적인 행사로 평가받았습니다. 총 관객 수 14만 5238명, 좌석 점유율 약 84%를 기록하며 지난해보다 증가한 수치를 보였다는데요. 특히 이는 300편 이상을 상영하던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도 역대 최고의 좌석 점유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빠띠 타운홀이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코로나19가 끝난게 이제서야 실감이 나는듯, 연말 다양한 행사가 이어지는데요. 빠띠 타운홀과 함께 하면 더 재미있는 이벤트와 투표를 만들수 있답니다. 빠띠 타운홀 사용 뿐만 아니라, 이벤트나 투표 기획도 지원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문의주셔요.

    빠띠 타운홀 문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