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내고 무언가를 샀다. 그 무언가는 내게 아직 자신의 효용을 증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돈을 낸 후에야 그 물건의 효용을 실험할 기회를 가질 때가 많다. 그리고 꽤 많은 물건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효용이 없음이 드러난다. 그럴 때 그 물건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니 지나가야 한다. 문제는 갈 데가 없는 물건들은 우리 주변에 쌓이기 시작하고, 그 물건들을 쌓아두기 위해 더 큰 집이 필요해진다. 이런. 이 불편과 비합리를 해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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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I don’t want impact other’s lives, any more. Just want Peace, Harmony and Inner Happines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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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을 좋아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
살아보니 나는 보라색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끔 그 이유를 발견하곤 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이렇다. 보라색은 빨강과 파란색을 섞으면 나오는 색이다. ( reflextional Eternal 님의 글 참고 ) 따뜻함과 차가움, 열정과 침착함을 오가는 마음. 그 사이를 오가며 보내는 시간들. 때론 붉은 톤이 강한 보라색이 되기도 하고, 때론 파랑색이 강한 보라색이 되기도 하는게 나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느낌이기 때문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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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쓸모
지금의 중국이 있는 땅에서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노자라는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단다. “그릇은 비어 있는 부분 때문에 쓸모가 생긴다”라고. 나의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워야 쓸모 있는 그릇이 되는 셈이다. 시도해 보고 싶은 가르침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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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라는 세대의 특징
전효관 하자센터 소장님과 어제 나눈 이야기가 재밌었던 점은. 30대의 우리가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낼 실력을 갖추었고 혼자선 지혜롭게 움직이지만 막상 자신의 문제들을 함께 풀어내지 못해서 고립되어 결국 그 자리를 맴도는 느낌이라는 지적이었다. 한번도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계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고, 조직과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소장님에겐 30대들이 자기 계발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조직에서는 여기까지만 기대하고 나머진 개인 차원에서 해소하려는 접근이 자신이 살아오신 것과 다르게 느껴지셨단다. 곰곰히 깊게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를 던져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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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면 하고 싶은 것 세가지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예를 들어 돈의 제약이 없고, 시간의 제약이 없고, 체력이나 관계의 제약이 없다면. 나는 우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재미난 서비스를 만들고 싶고, 기타를 둘러 매거나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고, 지구에 있구나를 느끼게 하는 대자연이나 상처와 평화를 테마로 삼고 여행을 다니며 시간과 자연과 삶과 사람을 배우고 싶다. 그리고 하나 더 욕심을 내자면 햇볕 잘 드는 큰 창가에 앉아서 동거냥이들과 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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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
선조들의 지혜가 말로 집약되었음을 느끼는 단어 중의 하나가 자유다. 스스로 自(자)자에 말미암을 由(유).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걸 자유라고 우리 선조들은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에 담아 놓았으니까. 스스로가 스스로의 이유가 되어 흔들리지 않는 상태. 그 상태가 바로 자유라는 지혜인가 보다. 자신다움의 상태가 바로 자유라는 게다.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기란 정말로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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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잠 교회 이야기
- 단잠 교회 목사님의 목소리는 너무도 부드럽고 달콤한데다 높낮이도 이렇다한 제스추어도 없어서, 힘든 일상에 지쳐버린 신도들이 일요일 오전 한 때 행복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었다.
-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교회당 안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달콤한 잠에 잠긴 신도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 누구나 “여기가 곧 천국이군요”란 말을 하게 만들었다.
-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을 피폐하게 만들어 버리는 정죄도 없고, 교회라는 공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크고 작은 선행을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조선일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메시지도 없었지만, 단잠교회 신도들과 목사는 일요일 오전 함께 꾸벅꾸벅 조는 그 시간을 너무도 좋아했고 사랑하기까지 했다.
- 그리고 그렇게 약 1시간 가량의 짧은 낮잠을 즐긴 후 교회당을 나서는 신도들은 평안과 자신감이 가슴 속에 다시 가득 채워졌음을 확인하곤 더욱 행복해 했다.
- 음..
- 실은.. 그런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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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과 나무
거대한 빌딩이 늘어간다. 빌딩이 늘어갈 수록 하늘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도시에 그늘은 깊고 넓게 사람들을 덮어 버린다.
나무가 되고 싶었다. 새들이 와서 깃들고, 멀리서 찾아온 바람을 붙들어 두고,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땅에 드리우고, 가을이 되면 맛나고 시원한 열매를 원하는 사람들, 동물들에게 나눠주며, 때가 되어 이 땅을 떠나갈 날이 오면 욕심없이 잎사귀를 털어내고 앙상한 가지, 줄기를 부모된 대지에 돌려주는..
왜 빌딩은 나무처럼 될 수 없을까? 왜 빌딩은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풍기고, 콘크리트벽으로 담을 쌓아 거리감과 거절감을 주는 것일까. 같은 그늘인데, 빌딩의 그늘은 얼어있고, 나무 그늘은 포근한 걸까.
내가 그 빌딩의 한칸에 자리잡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여유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피해의식과 공연한 불평이 내 맘에 가득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빌딩을 원망하는 걸까? 그만큼 열심이지 못했고, 그만큼 치열하게 살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앞선 사람을 흠집내는 패배자이기 떄문에?
사람들이 달린다. 그러나 우리의 달리기는 동일한 출발점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또한 모두다 달리는 것만도 동일한 길을 가는 것 아니다. 누구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어떤 자들은 발이 묶인 채 돌밭을 기어간다.
교회도 달린다. 정신없이 따라간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앞선 자들과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앞선 적은 없었다. 그들과 같은 차에 타고 있을 때 세상과 동일한 일을 행할 떄 가장 앞서 있었던 적은 있으나, 교회는 결코 세상을 앞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열심히 교회는 그들을 닮으려 애쓰고 앞지르기 위해 세상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목적과 수단이 언제나 비슷했다.
지금 난 달리지 않고 서 있다. 그러나 어디에 서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도시에 나무가 들어서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다.
빌딩 앞과 화분, 그리고 공원에 자리잡는 길.. 드러난 목적은 같으나 그래서 더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켜 버리는 反나무..
척박한 콘크리트와 시멘트 땅에 잡초로 피어 나무를 꿈꾸는 길.. 물론 사람들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기에 뿌리까지 뽑히지 않는다면..
도시의 중심에서 벗어나 아직 개화되지 않은 산동네에서 삶을 가꾸는 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람도 불지 않는 도시의 삶에 찌들려 척박하고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에 자리잡고 자라는 길..
PS. 내부 고발자를 꿈꾸는 사람은.. 어디에 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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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자이기 때문에..
약자의 편에 서는 이유는
제가 약자를 옹호하기 떄문이 아니라
제가 약자이기 때문입니다.저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불법을 저지르고 죄악 가운데 지내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항의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더 이상의 애착이 없는 내가 무슨 삶을 보장받기
원하겠습니까?
다만 사랑하는 당신이 안타까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평화와 화해, 용서와 회개를 구하는 청년들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