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시민들이 만들 일상의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들은 더욱 고립되고 무관심과 각자도생이라는 생존 전략에 갇히게 된다. 결국 사회는 혐오와 갈등, 불신과 분열에 물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희망은커녕, 당장 생존 경쟁이 모두의 일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이 글은 생태환경문화잡지 <작은것이아름답다> 284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해 왔는가

응원봉을 쥔 시민들이 다시금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군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들었던 화염봉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촛불로, 그리고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다채로운 빛의 향연을 선보이는 응원봉이 되기까지. 시민들의 손에 들린 상징물은 그 시대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자 지향점을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세상이 빛과 어둠에서 빛의 향연으로 바뀌었음을, 모든 것을 압도할 만한 연대가 폭력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켜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0년 전에 대학을 다닌 뒤 평생을 한국 사회의 엘리트로 살아온 어떤 이들에게 법과 제도란 한낱 자신들 이익을 지켜주는 도구일 뿐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나고 자란 시민들에게 법과 제도와 민주주의는 당연히 따르고 지켜야 할 규범이자 상식이었다. 청년들로 구성된 군대가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소극 대응한 이유는 그들에겐 그게 상식이자 정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갈라치기와 낙인찍기에 시달리면서도 탄핵 이전부터 우리 사회에 포용과 공정을 요구해왔던 청년들은 광장의 맨 앞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연대 의식을 표현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치는 성소수자,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 노동 현장의 노동자, 농촌을 지키는 농민들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은 함께 다양한 현장을 함께 오가며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즉 다양성과 포용, 연대와 협력, 상식과 정의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는 함께 지켜야 할 우리의 정체성이자 광장에서 살아 숨 쉬며 실체로 살아났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이러한 시민들의 상식과 열망과 달리, 지난 정부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들은 출범하자마자 사회 구성원들을 ‘낙인’을 찍고 ‘갈라치기’했다. 장애인의 이동권 요구, 청년들의 성평등 실천,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활동을 ‘반사회 활동’으로 규정하고, 지원을 끊고, 감사와 고발로 압박했다. 

대통령을 풍자한 고등학생의 그림이 수상하자 담당자는 문책을 받았고, 대통령을 비판한 기자와 언론사는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됐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의대 정원 정책에 대한 현장의 비판에는 실제로 입을 틀어막고 내쫓아버리는 ‘입틀막’으로 대응했다. 선거에서 국회 다수당 구성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이 선출한 국회마저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고 무시하더니 드디어 ‘처단’에 나섰다.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출범한 정권은 결국, 자신들과 그 지지자들의 자유와 권리만을 지키려 했다. ‘낙인찍기’는 ‘혐오’를 낳았고, ‘갈라치기’는 ‘배제’를 낳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입틀막’이라는 ‘억압’을 거쳐, 마침내 친위 쿠데타를 통한 실제 ‘처단’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공권력은 그들을 지키는 방패이자 칼이었고, 법과 제도도 마음대로 비틀 수 있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

매우 위태롭게도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한국 사회는 이미 복합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기후 위기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고, 국제 정세는 불안정하며,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중소상공인의 줄도산은 코로나19 시기보다 더 심각하고, 지역 소멸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노동과 교육, 산업에 큰 충격을 예견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사회적 준비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들은 더욱 고립되고 무관심과 각자도생이라는 생존 전략에 갇히게 된다. 그 결과 사회는 혐오와 갈등, 불신과 분열에 물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커녕, 당장 생존 경쟁이 모두의 일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멋진 시민들의 탄생

우리는 언제 ‘시민’이 되는가?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에 몰입하는 개인이, 사회적 책임과 연대 의식 을 가진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은 언제일까?

복합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협이 교차하던 시기, 군인들이 국회 앞에 등장하자 시민들은 곧바로 국회 앞으로 달려갔다. 저마다 자리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시민들은 분노와 염려를 나눴고, 시민의 힘이 모여 마침내 헌정 질서를 지키는 역사를 이뤄냈다. 그 과정을 통해 많은 시민들은 스스로 한 개인이 거대한 공동체에 기여하는 효능감을 확인했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 서로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진 시민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그리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만들어낸 힘은 곧 연대의 힘이다. 사회에서 모든 개개인 힘만으로 완전한 안전을 확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나를 향한 존중과 연대를 경험하며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며, 나아가 그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다. 서로 존중하는 공간이자 연대의 공간인 광장에서 시민들은 공동체 일원으로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100여 일에 걸친 시간 동안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에서 ‘멋진 시민’으로 태어났다. 시민 개인의 효능감과 서로를 잇는 효능감을 통해 공동체의 효능감을 느끼고,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감과 소속감을 가진 시민은 그 존재 자체가 마치 응원봉의 빛처럼 우리 사회를 희망으로 이끌 존재들이다. 이 시민들 한명 한명이 우리 사회가 문제 해결 능력을 회복하고, 모두를 위한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더 많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꿈꾸는 법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광장에서 함께 만들어낸 변화의 열망과 성과는 이제 일상에서 실천할 과제가 됐다. 민주주의는 시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족, 학교, 직장, 마을을 비롯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연대하며, 상식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상의 실천 속에서 구현된다. 

광장에서 드러난 시민의 열망은 단순한 권력 구조의 개편이 아니라, 다양성과 포용, 연대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실제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였다. 이 요구를 실천하기 위해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목소리를 모으고, 대화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지금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 경제 불평등, 사회적 갈등 같은 복합 위기는 모두가 저마다 삶에서 체감하고 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조건을 가진 시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함께 그 문제들에 대한 공동체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은 행정과 의회를 넘어 시민에게 더욱 분산돼야 한다. 2017년 촛불 뒤 잠시 열렸던 시민 참여, 협치, 자치의 공간은 다시 열리고 확장돼야 하며, 실제 정책과 사업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제도화돼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 시민사회가 함께 만드는 지속가능한 협력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 주권이 선거와 시위와 같은 일회성 참여에서만 실현되지 않도록 다양한 제도 도입도 필요하다. 국민 발안제, 국민 소환제, 국민 투표제 같은 다양한 민주주의 장치는 여전히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 시민의회나 디지털 시민참여 플랫폼 같은 여러 방식을 통해 시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실제로 참여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더 나아가 시민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기업과 기술에 대해서도 시민의 권리가 확보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 한 사람이자 유권자로서 권리가 확장되는 만큼, 소비자 권리, 노동자 권리, 주주의 권리, 글로벌 기술 혁신에 깊은 영향을 받는 디지털 사회의 시민 권리가 필요하다. 이는 기존에 존재하는 기업이나 기술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대안들을 지속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대안이 없으면 시민의 권리는 제대로 발휘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의 미디어 환경은 오히려 극한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며 민주주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알고리즘에 왜곡된 여론은 혐오와 갈등을 확대하고,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시민들이 함께 모여 안전하게 이야기하고, 다름을 존중하며, 공동 해법을 찾는 디지털 시민 공간이 전무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에겐 ‘일상의 디지털 시민 광장’이 절실하다.

혐오와 여론 조작에 취약한 플랫폼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안전한 대화의 환경, 협력의 기반을 제공하는 디지털 공론장이 마련돼야 한다. 이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은 시민의 연결과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 자산이며, 기술과 제도에 대한 공공성과 책임성을 스스로 강하게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 역시 비영리 기관이나 사회적 경제 주체들이 운영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수 있다.

일상의 민주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기술을 활용해 우리는 광장에서 꿈꿨던 ‘더 많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일상에서 실현할 수 있다. 갈등이 혐오와 낙인,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연대하고, 상식과 정의를 지키며,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하고 포용하며 협력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복합 위기를 모두를 위한 방식으로 함께 해결하며, 결국 모두가 함께 살고 싶은 공동체를 시민의 힘으로 만들 것이다.

다시 민주주의 배우고 가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 공동체는 도전 받고 있다. 권위주의, 극단주의, 갈등과 혐오가 공동체를 흔들고 있으며,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경제 위기와 국가 간 갈등, 심지어 기술 혁신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초고속 인터넷망을 전국에 설치하며, 이 지구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 민주주의, 문화적 풍요를 이뤄냈다. 국민들이 만들어낸 성취와 공식은 세계에서 부러움을 사며 따라야 할 모델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성공의 공식들이 지금은 우리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전체를 사막으로 만들고 있다. 사회, 경제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갈등과 혐오는 불신을 넘어 부정적 감정을 동반한 존재의 부정으로 발전했으며,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재난과 재해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출산율과 자살률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실을, 반복되고 악화되는 사회적인 재난과 자연재해는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를 착취하는 현실을 반증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한번 더 많은 발전과 더 새로운 기술이 이 상황을 해결하리라 여기고 기존의 공식을 더 강화해 인간 스스로의 생태적 한계를 비롯해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생태계의 한계를 무시하고 있다. 더 효율성 있는 발전을 위해 더 뛰어난 소수의 무리가 기술을 활용해 사회를 이끄는 것이 상황을 해결하리라고 믿고 실행에 나서기도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공지능(AI)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국가가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더 희귀한 자원을 추출하고, 더 많은 물과 전기를 생산하고 소비하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며 현재의 문제를 악화하는 상황은 단기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관점도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만들어낸 공식으로 현재의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는 한계를 자각하고 존중하는 개인들이,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존재들의 가치와 상황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함께 연대하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며 민주주의와 생태주의 관점에서 문제를 다뤄야 한다. 이는 위기 극복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사회를 연대와 안전, 신뢰와 협력, 풍요와 지속가능성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확립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행히 우리는 이미 여러 위기를 함께 극복해 왔다. 한국 사회는 시민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렸고, 촛불로 정의를 세웠으며, 응원봉으로 미래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시민들의 힘으로 역사를 만들 수 있음을, 목소리를 모으고 서로 연대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음을 우리는 함께 경험했다. 

우리는 다시 전환점에 섰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공동체를 다시 구성해야 할 시기다. 희망은 우리가 나누는 일상의 대화 속에, 사소한 연대와 실천 속에 스며들어 있다. 멋진 민주주의는 멋진 시민들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진정으로 ‘멋진 민주주의’를 만들 멋진 순간을 잡았다.


권오현 – 디지털 시민 광장 빠띠의 대표와 시빅해킹커뮤니티 코드포코리아의 오거나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연결하고 협력하는 디지털 기술과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 공공재, 평화에 기여하는 플랫폼과 컬렉티브를 만든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자유롭고 행복한 개인들이,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풍요롭고 지속가능한 공동체와 평화로운 삶과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