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과 나무

거대한 빌딩이 늘어간다. 빌딩이 늘어갈 수록 하늘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도시에 그늘은 깊고 넓게 사람들을 덮어 버린다.

나무가 되고 싶었다. 새들이 와서 깃들고, 멀리서 찾아온 바람을 붙들어 두고,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땅에 드리우고, 가을이 되면 맛나고 시원한 열매를 원하는 사람들, 동물들에게 나눠주며, 때가 되어 이 땅을 떠나갈 날이 오면 욕심없이 잎사귀를 털어내고 앙상한 가지, 줄기를 부모된 대지에 돌려주는..

왜 빌딩은 나무처럼 될 수 없을까? 왜 빌딩은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풍기고, 콘크리트벽으로 담을 쌓아 거리감과 거절감을 주는 것일까. 같은 그늘인데, 빌딩의 그늘은 얼어있고, 나무 그늘은 포근한 걸까.

내가 그 빌딩의 한칸에 자리잡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여유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피해의식과 공연한 불평이 내 맘에 가득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빌딩을 원망하는 걸까? 그만큼 열심이지 못했고, 그만큼 치열하게 살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앞선 사람을 흠집내는 패배자이기 떄문에?

사람들이 달린다. 그러나 우리의 달리기는 동일한 출발점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또한 모두다 달리는 것만도 동일한 길을 가는 것 아니다. 누구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어떤 자들은 발이 묶인 채 돌밭을 기어간다.

교회도 달린다. 정신없이 따라간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앞선 자들과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앞선 적은 없었다. 그들과 같은 차에 타고 있을 때 세상과 동일한 일을 행할 떄 가장 앞서 있었던 적은 있으나, 교회는 결코 세상을 앞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열심히 교회는 그들을 닮으려 애쓰고 앞지르기 위해 세상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목적과 수단이 언제나 비슷했다.

지금 난 달리지 않고 서 있다. 그러나 어디에 서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도시에 나무가 들어서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다.

빌딩 앞과 화분, 그리고 공원에 자리잡는 길.. 드러난 목적은 같으나 그래서 더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켜 버리는 反나무..

척박한 콘크리트와 시멘트 땅에 잡초로 피어 나무를 꿈꾸는 길.. 물론 사람들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기에 뿌리까지 뽑히지 않는다면..

도시의 중심에서 벗어나 아직 개화되지 않은 산동네에서 삶을 가꾸는 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람도 불지 않는 도시의 삶에 찌들려 척박하고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에 자리잡고 자라는 길..

PS. 내부 고발자를 꿈꾸는 사람은.. 어디에 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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